예전에 과학팟캐스트 '격동500년'이란 코너에서 꽤 자세히 들었었습니다 (근데 영상은 좀 어색하네..?)
1) https://www.youtube.com/watch?v=8cuOSRe3b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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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ㅅㅂㄴ이 우박사 엄마죽었는데도 안보내줌 딸결혼식인데 안보내줌 기념관도 넘작게 울집 근처에 있음 가서보면.울분 더커짐 이승만이하 친일파 토왜 죽이고싶음
MOVE_HUMORBEST/1787030
행한 한일역사 속에서 우범선(禹範善), 우장춘(禹長春) 두 부자(父子)가 걸어온 길. 우장춘(禹長春). 한국에서는 「농업의 아버지」로 불려지며, 초등학교의 교과서와 전기(傳記)를 통해서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우범선(禹範善)이 조선왕비 민비(閔妃)의 암살에 가담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국민으로부터 추모 받는 아들과「역적」의 낙인을 찍은 아버지. 우(禹)부자(父子)의 생애를 통해, 한일사(韓日史)를 알아본다. ◈ 반역자인 아버지 1903년 11월 26일. 일본 츄고쿠(中國)신문의 조간(朝刊) 1면에는 충격적인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었다. 「한국으로부터 망명한 우범선(禹範善)이 살해당하다」당시의 스타일로는 파격적이었던 이 기사는 고영근(高永根), 노윤명(魯允明) 두 명의 한국인이 쿠레(?)시내 자택에 사는 우범선을 초대해, 망치와 단도(短刀)로 살해한 사건에 대해서 보도한다. 우범선은 일청(日淸)전쟁 직 후의 1895년 10월. 일본의 외교관들이 계책한 조선왕비(朝鮮王妃) 민비(閔妃)의 암살사건에 가담한 후, 일본에 망명한 조선왕조 군(軍)의 전(前)소령이었다. 청일(淸日)전쟁의 승리로 한반도에의 세력확대를 꿈꿨던 일본은 러시아와 함께 민비(閔妃) 정권의 전복(顚覆)을 계획. 일본식 훈련을 받은 조선군(朝鮮軍)과 함께 암살을 결행한다. 범선은 그 대장이었다. ◈ 아버지 우범선의 일본생활 망명(亡命) 후, 범선(範善)은 동경(東京)에서 만난 일본인 사카이 나카(酒井ナカ)와 결혼한다. 그로부터 3년 후(1898년), 장남인 장춘(長春)이 태어났다. 그리고, 히로시마현(?島?) 쿠레시(?市)에서 범선(範善)은 그의 특기인 한시(漢詩)를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 후, 장춘(長春)이 만 5세일 때 아버지가 살해당한다. 그리고, 어머니와 그의 동생들과 함께 쿠레시(?市)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 우장춘의 성공 1916년, 쿠레(?)중학교를 졸업한 장춘은 동경대(東京大) 농과대학(農科大學) 농학실과(農學?科)에 입학한다. 1919년, 당시의 농상무성(農商務省)에 취직한 장춘은 일본인 와타나베 코하루(渡? コハル)와 결혼해,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가지게 된다. 직장에서는 식물의 유전에 대해서 연구. 당초에 몰두한 나팔꽃 연구로 쓴 박사논문을 화재(火災)로 잃어버리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지만, 곧 유채씨앗의 게놈분석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성장은 빠르지만, 수확은 적은 일본종(種) 유채씨앗과 수확량은 많지만, 성장이 늦은 서양종(種)을 교배시켜, 각각의 장점을 가진 신종(新種)개발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유채씨앗의 경우, 일본종과 서양종에 염색체 수가 다르며, 교배하여도 좋은 품질의 종자는 안정적으로 거둘 수 없었다. 장춘은 우선, 일본종과 양배추의 교배로 서양종과 같은 염색체를 가진 신종을 개발. 이것을 서양 유채씨앗와 교배해, 양쪽의 장점을 가진 새로운 종자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장춘은 이러한 성과를 「종의 합성」이라는 박사논문에 정리해 1935년에 동경대 농학부에 제출한다. 그리고, 1936년. 장춘은 조선인으로서 처음으로 농학박사의 학위를 받는다. 6년 전, 나팔꽃의 연구로 이루지 못했던 꿈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 두 개의 조국 장춘은 39살의 해, 교토(京都)의 대기업종묘(種苗)회사 ‘타키이(タカイ)종묘’의 농장장으로 일하게 되었으며, 일가는 현재의 교토부(京都附) 나가오카쿄시(長岡京市)로 옮긴다. 종전(終戰).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에는 하나의 조직이 만들어졌다. 「우장춘박사 환국 추진 위원회」. 힘든 식량사정으로, 장춘의 「귀국」실현을 목표로 하는 지식인들이 시작한 운동이었다. 1950년 3월. 장춘은 단신으로 아버지의 조국. 한국의 땅을 밝는다. “돌아와줘서 고맙다.” 환영회에서 먼저 이승만대통령의 메시지가 전해졌다. 부산의 한국농업 과학연구실의 초대 소장에 취임. 무, 배추의 품종개량에 착수. 한국전쟁 발발로 인한 식량난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의 재래종을 교배시켜, 김치에 적당한 신종을 만들어 낸다. 온난한 제주도의 귤과 고랭지(高冷地)의 감자, 수량이 많은 벼의 재배에도 힘을 쏟았다. 1959년 8월 10일. “한국은 알아 주었다.” 같은 말만 되풀이 하며, 위궤양의 악화로 장춘은 61년의 생애를 마감한다. 죽기 직전, 한국정부는 9년 간의 공로에 문화포장(文化褒章)을 수여한다. 두 국가 사이의 기묘한 인생을 걸어나가면서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두 조국, 그리고 세계의 농업발전에 큰 기초를 쌓은 우장춘. 부산시의 연구소 묘지에는 「농업의 아버지」업적을 기린 기념관이 있다. 출처: 2009. 8월 주고쿠신문(中?新聞) 이토마사유키(伊東雅之) 취재 주히로시마 대한민국 총영사관 https://overseas.mofa.go.kr/jp-hiroshima-ko/brd/m_20715/view.do?seq=706884&srchFr=&srchTo=&srchWord=&srchTp=&multi_itm_seq=0&itm_seq_1=0&itm_seq_2=0&company_cd=&company_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