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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0-T | 26/09/08 23:55 | 추천 7 | 조회 16

서양과 다르게 발전한 동양의 대 기병 전술의 반론 +16 [6]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76603554

서양과 다르게 발전한 동양의 대 기병 전술의 반론

https://bbs.ruliweb.com/best/board/300143/read/76602780?m=humor_only&t=now


은 맞는 부분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으나 답글로 작성하기는 길어서 별도로 분리합니다.


1. 서양의 대기병전술 = 장창의 벽 X


장애물·참호·말뚝, 방패와 창, 장창/파이크 밀집대형, 궁수·석궁병, 총병과 장창병의 혼합대형, 기병으로 기병을 견제, 지형 활용 등등 어느 하나가 대표적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기병의 돌격을 긴 무기를 밀집시켜 막는 원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보편적인 군사적 해결책입니다.


따라서 "서양 = 장창벽 / 동양 = 전혀 다른 방식" 이라는 대비는 역사적으로는 지나친 이분법입니다.


2. 중국은 4천 년 동안 보병으로 기병을 막아왔다 X


중국의 전쟁사에서 기병과 보병의 관계는 시대마다 크게 달랐습니다.


상나라·서주 시기에는 전차가 핵심이었고, 전국시대에는 기병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특히 조 무령왕의 호복기사(胡服騎射)가 유명합니다. 사기는 무령왕이 북방 세력의 기동력을 받아들여 기병과 기마궁술을 강화했다고 기록합니다.


즉 중국의 군사사는 "기병에게 계속 얻어맞은 보병이 대기병술을 발명한 역사" 가 아니라,


전차 -> 기병의 발전 -> 보병·기병·궁노병의 결합 -> 지역과 시대에 따른 다양한 조합 에 가깝습니다.


3. 전차가 버려지고 수레가 기병의 카운터가 되었다 X


기원전 99년 이릉은 불과 5,000명의 보병·궁수를 이끌고 흉노 영역으로 들어갔다가 선우의 대군과 조우합니다. 


한서 계열 기록에 따르면 흉노군은 8만 명이었고, 이릉군은 후퇴하면서 8일 동안 싸웠습니다.


결국 이릉군은 절반 이상을 잃고 식량과 화살도 고갈되어 항복했지만, 흉노군에 1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입혔다고 기록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수레입니다.


이릉군은 단순히 평지에 보병을 세워 놓고 "기병 돌격을 몸으로 받았다" 가 아닙니다. 수레와 지형을 이용하여 보병의 방어력을 높이고, 그 뒤에서 궁수·노수 등이 사격했습니다. 


이러한 전술은 실제로 기병의 접근로를 제한하고 보병의 화력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릉은 승리하지 않았습니다. 8일 동안 버텼고 상당한 피해를 줬지만 결국 포위되어 항복했습니다.


따라서 글의 "5천으로 8만 기병을 막았다" 라는 표현은 전술적 성공을 지나치게 승리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4. 제갈량의 팔진도도 이런 수레진이었을 것이다 X


글에서도 "아마"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제갈량의 팔진도는 후대에 수많은 전승과 해석이 붙었지만,

우리가 오늘날 실제 전투에서 사용된 정확한 형태를 복원할 정도의 자료는 없습니다.


5. 마륭 사례 O

마륭군은 겨우 3,500명이었습니다. 반면 독발수기능 쪽은 수만 명 규모였습니다.

그런데 마륭은 병력 열세 + 기병 중심의 적 + 산악·협로 라는 상황에서 수레 궁노 방어구 진형 지형 을 결합했습니다. 


진서에는 적군이 여러 차례 앞을 막고 뒤에서 매복하고 좁은 길에서 공격 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마륭군은 수레진을 이용해 이를 돌파했습니다. 결국 무위까지 진격하고, 독발수기능의 세력 상당수가 항복했으며, 최종적으로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따라서 "수레가 기병을 상대하는 유효한 방법이었다" 는 주장은 마륭 사례에 한정해서는 맞습니다.


6. 그런데 중갑기병이 등장하면서 수레진이 깨졌다 X


여기부터는 과도한 일반화입니다. 중장기병이 등장했다고 해서 수레진이 갑자기 무용지물이 된 것은 아닙니다.

수레진이 중장기병 때문에 깨졌다라고 일반화할 만한 단일한 역사적 사건이 없습니다.


7. 당 이후 중국의 북방 이민족 잔혹사가 시작됐다 X 


이건 상당히 과장된 서술입니다.


당나라 자체가 대표적인 반례입니다.


당은 오히려 돌궐 철륵 거란 말갈 서역계 세력 등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면서 기병 전력을 대규모로 운용한 제국입니다. 당 태종 시대의 군사력은 보병만으로 북방 기병을 상대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나라와 이후 왕조를 보면 기병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느냐 가 굉장히 중요한 전략적 문제가 됩니다.


8. 남송이 극단적인 카드로 중장보병을 만들었다 X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


송나라에는 실제로 매우 중장비화된 보병이 존재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보인갑(步人甲)입니다.


전승되는 수치에 따르면 1134년 남송에서는 보인갑의 갑엽이 약 1,825개, 기본 중량이 약 58송근, 즉 대략 29kg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역할에 따라 장창병·궁수·노수 등의 장비 중량이 달라졌다는 기록도 전합니다.


따라서 "남송이 엄청나게 무거운 보병 장비를 만들었다" 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갑옷 30kg = 기병 돌격을 몸으로 받는 표현은 부정확합니다.


보인갑이 29kg이라고 해서 "말의 충격을 인간의 몸으로 받아냈다" 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중장보병은 자기 몸만으로 기병을 막은 것이 아닙니다. 실제 대기병전은 무기 + 밀집대형 + 갑옷 + 장애물 + 궁노 + 지형 을 합친 시스템입니다.


즉 30kg의 갑옷은 "말을 몸으로 받아내기 위한 갑옷" 이라기보다 "적의 화살·창·도검에 노출되는 보병이 살아남으면서 대열을 유지하기 위한 방어력 증가" 라고 보는 것이 훨씬 정확합니다.


9. 실제로 남송군이 중장기병을 어떻게 상대했는가?


여기서 아주 좋은 사례가 순창 전투(1140)와 언성 전투(1140)입니다.


순창 전투 금군에는 중장갑 기병 및 중장갑 병력이 있었습니다. 


송사 계열 기록에는 금군의 정예부대인 철부도(鐵浮圖)가 등장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중갑을 착용하고 3명이 하나의 단위처럼 연결되어 거마(拒馬)를 함께 전진시키는 형태로 싸웠습니다.


송군은 창으로 투구를 걸어 벗기고 도끼로 공격하고 근접전에서 격파 했습니다.


즉 실제 전투에서도 "중장기병 vs 중장보병" 이라는 대결이 나타났습니다.


1140년 언성 전투에서는 완안종필의 금군 기병 약 1만 5천 기가 악비군과 충돌했습니다.


악비의 승전보고에는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악비군 병사들이 마착도(麻?刀) 제도(提刀) 대부(大斧) 등을 들고 금군과 근접전에서 싸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手??劈" 즉 적과 붙어서 직접 베고 공격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남송군이 단순히 "화살을 쏘다가 기병이 오면 방패 뒤로 숨었다" 는 것은 아닙니다. 기병의 돌격이 충분히 억제되거나 혼란에 빠진 순간 보병이 근접전으로 들어가는 것도 실제 전술이었습니다.


10. 그렇다고 중장보병이 기병을 완전히 카운터쳤다 도 아닙니다.


순창·언성의 승리는 중장보병 하나의 힘 때문이 아닙니다.


대략 성곽/진지,강노·궁노,보병,장애물,정예병,지휘관의 전술 적의 피로·지형·보급 문제 기타 등등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실제로 순창에서는 금군이 장거리 행군으로 지쳐 있었고, 더운 날씨와 수분·보급 문제가 있었으며 송군은 이를 이용했습니다.


따라서 "중장보병이 중장기병을 이겼다" 보다 "남송군이 중장기병의 충격력을 상쇄할 수 있는 복합적인 대기병 체계를 발전시켰다" 가 훨씬 정확합니다.


11. 명나라부터 화기의 등장으로 이런 방식이 필요 없어졌다 


이것 역시 방향은 맞지만 너무 단순합니다. 명나라에 들어가면서 화기의 중요성이 급격히 커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화기 등장 -> 중장보병 즉시 소멸 은 아닙니다. 오히려 명나라 군대에서도 창병 방패병 화기병 궁수 기병 이 결합된 혼합전술이 장기간 유지됩니다. 즉 변화는 중장보병 -> 화기병 이라는 단순한 교체가 아니라 냉병기 중심의 복합전투 -> 화기 비중이 점점 커지는 복합전투 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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