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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石 | 19/06/25 18:24 | 추천 50 | 조회 13130

스압)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명작인 이유 +793 [10]

오늘의유머 원문링크 https://m.todayhumor.co.kr/view.php?table=bestofbest&no=41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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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대한 좋은 비평들은 간단하게 구글링만 해도 잔뜩 나오기 때문에, 본 글이 기존에 나온 글 이상의 가치는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글을 적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최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과소평가 받는다는 것을 느껴 글을 적어본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겉만 화려할 뿐 다른 명작들에 비해 내실은 없다는 글을 봤는데, 개인적으론 공감하기 힘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지브리 애니메이션 중에서 최고는 아닐지라도, 여전히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유효한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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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대해 자세히 들어가기 전, 하야오의 작품 대부분에 등장하는 비행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하야오는 아버지의 군용기 부품 공장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하늘을 나는 것에 로망을 품었고, 일본이 패배한 이후 그 비행기들이 사람들을 죽인 기계임을 깨닫고 충격을 받게 된다. 이러한 하야오의 어린시절과 비행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알지 못하면 그의 작품을 잘못 읽게 된다. '바람이 분다'를 보며 미야자키 하야오는 극우 성향 인물이라는 분석이 대표적인 오독인데, 하야오는 절대 모든 비행을 긍정하지 않으며 현 일본 극우 정당의 노선과 정 반대의 의견을 내고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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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 역시 하야오의 반전주의, 반제국주의를 엿볼 수 있다. 마을 한가운데를 행진하는 군인들과 그 모습을 보며 국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대중들의 모습은 2차 세계대전 시절의 일본 제국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 같다. 그러나 하야오는 새까만 매연으로 이 장면들을 덧칠한다. 도시를 물들이는 검은 매연과 온 세상을 불바다로 만든다는 전쟁터의 검은 하늘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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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전쟁이 민간인들의 삶과 이격된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소피가 항구 마을의 바닷가가 아름답다고 말하자마자 바다에는 포탄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곧 폭격될 터전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라야한다.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전쟁을 피해 계속 도망치는 하울의 은신처, 꽃밭의 오두막에도 전함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장면이다.

전함을 보며 '적인지 아군인지' 소피가 질문하자 '어느쪽이든 상관 없다'면서 전함을 공격하는 하울의 모습은, 이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군국주의 시절 일본을 비판적으로 회상하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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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전쟁은 나쁘다'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에서 끝나는 한 편의 동화였면 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명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악역 왕국측을 대표하는 인물 설리먼에 잠시 주목하자. 그녀는 "국왕은 불온한 마법사들을 그냥 두면 안된다고 판단했다. 하울이 국왕을 위해 일하러 오지 않는다면 황야의 마녀처럼 힘을 빼앗을 것이다" 라며 하울을 협박한다. 이러한 설리먼의 대사와 전쟁이라는 작품의 배경을 통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단순한 반전주의가 아닌 좀 더 철학적인 담론으로 들어간다. 아도르노의 동일성의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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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는 '계몽'이 인간들을 야만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했다. 원시시대에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했고, 자연의 강대한 힘 앞에 매일 죽어나가야 했다. 때문에 인간은 자연에 맞서기 위해 사회적인 관계를 택했고, 이성과 계몽을 통해 결국 자연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런 계몽엔 부작용이 있었다. 강대한 자연에 맞서기 위해 인간들은 일치단결해야 했고, 때문에 수많은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내적 자연, 즉 욕망이나 실존적인 행복들은 무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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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내적 자연을 제거당한 인물들, 제식에 맞춰 행진하는 군인들이나, 외모가 똑같은 설리먼의 시종들을 보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세계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자리했는지, 미야자키 하야오가 무엇을 경계하는지 알 수 있다.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들을 지배하기 위해 하나된 전체로 만들기 시작할 때, 인간은 개인의 가치를 잃고 사회를 움직이는 부품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사회의 부품이 되지 못하는, 쓸모없거나 반동적인 인물은 범죄자나 마찬가지다.

즉 하울의 성이 움직이는=도망가는 이유는, 하울 개인의 가치가 오직 전쟁에 도움이 되는가? 라는 전체의 가치로만 판단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법에 재능이 있고 멋있는 사람이어도, 왕국의 입장에서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마법사는 쓸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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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인물들을 살펴보자. 왕국 입장에서 도움이 안 되는 마법사들인 하울과 황야의 마녀를 포함, 어린애, 노인, 허수아비 등 굉장히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전시 노동력으로는 쓸모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호수를 찾아 빨래를 하고, 차를 마시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초라하고 거대하며 필사적으로 전쟁을 피해 걸어가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주인인 하울을 닮았다. 그리고 그런 하울의 성을 가장 먼저 변화시킨 것은 청소부로 들어와 하울의 성을 깨끗하게 청소하기 시작한 주인공 소피다. 소피는 캘시퍼를 칭찬해 힘을 북돋고, 하울에게 설리먼과 마주할 용기를 주었으며, 황야의 마녀가 하울의 심장을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소피의 애정 섞인 소통은 제국이 선택한 명분 없는 전쟁과는 명백한 대비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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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라는 것은, 더러워진 것을 깨끗했던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울의 성을 움직이는 불의 악마 캘시퍼가 하울의 어린시절 심장 = 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소피가 고쳐낸 것은 죽어가는 별똥별을 살리기 위해 심장을 내어주던 하울이라는 한 개인의 순수함이다. 전쟁에 지쳐 마음을 잃고 죽을 위기에 처한 하울은 소피의 도움으로 어린시절의 따뜻한 마음을 되찾는다.

이윽고 어리석은 전쟁은 끝나게 된다. 사회에 억눌린 인물로 시작한 소피와 하울은 결말에선 그 누구보다 자유롭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전함 머리 위에서,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모습은 이 작품이 단순한 로맨스가 아님을 시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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