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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놜스섹.. | 19/07/23 21:37 | 추천 32

국민 방위군 사건(feat.화랑도정신) +349 [19]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1187082258


안녕 게이들아

날이 매우 더운데 뻘글 하나 싸질러본다


(중공군 사진임)


한국전쟁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 un군과 한국군의 전선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어.

 


위기의 조국과 연합군은 1·4후퇴의 위기를 넘기면서 37도선에서 간신히 전선의 안정을 기하였지만, 중공군과 북괴군의 연속적인 공세에 전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지...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우리의 자유 독립을 위한 최후 결전 단계임을 선언하고 국민총력전으로 이를 극복하겠다는 성명을 발표를 해버려.

 


이승만 각하 아이디어 ㅍㅌㅊ?

 

이렇게 해서, 이승만 각하의 성명으로 소집영장을 기다리던 청년들 사이에는 자진입대를 요청하는 인원이 증가하였고, 이들 중에는 “나는 화랑도 정신을 갖고 있다. 전쟁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신명을 바칠 것이다”라는 혈서를 쓰고 지원한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조국을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자원한 사람도 있었지만, 물론 강제도 있었겠지?


입대하는 개굴짱...

 

그러나 이 무렵 미국정부가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는 것보다 기존부대를 보충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해, 그 계획은 어렵게 되어버려..

 


하지만, 끝까지 한국정부는 중공군과 맞서 싸우려면 많은 병력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독자적으로 국민방위군을 설치하게되지. 국민방위군은 1950년 12월 21일 공포 실시된 ‘국민방위군 설치법’에 의하여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제2국민병(상비군? 비스무리한듯).

 

지금과는 다르게 병력 응모를 시작하자 순식간에 17세부터 40세까지의 장정들이 순식간에 50만 명을 넘음. 정부는 이들을 경남북도 일원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 및 수용해 간단한 제식훈련을 받음ㅎ.


(걍 사진이뻐서 넣어봄. 의미없음)

 

당시 간부는 대체로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었음.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국민방위군 사령관에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을 단번에 준장으로 임관시켜 임명하고 참모진을 구성함. 최소한의 기간요원만이 현역으로 임명되었고, 나머지 지휘관은 모두가 주로 청년단 출신에서 급조된 방위군 장교로 충당함... 지금보면 허술하기짝이없지... 안타까워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령부의 고급 간부들이 보급품을 부정으로 착복함으로써 급기야 사고가 발생하고 말지. 영하의 기온에서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수많은 장정들이 식량과 피복을 지급받지 못해 곧바로 병력 1천여 명의 아사 및 동사자가 발생;; 하였고 수 만 명이 영양실조에 걸려 이후 사망에 이르지(사망자 수는 9만여 명 이상으로 추정됌). 부당한 처우를 견디지 못한 국민방위군들은 집단탈출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사실이 국민들에게 알려지자 문제가 되기 시작함;;; 기껏 내새끼 보내놨더니 적한태 죽은게 아닌 보급품 및 지원금 횡령으로 인해 굶어 죽고, 얼어죽으면 ㄹㅇ멘탕붕괴...


윗대가리 뭐했노 이기...

 

무튼...결국 이 사건에 대해 국회 재조사 과정에서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재무실장 강석한, 조달과장 박창언, 보급과장 박기환 등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방위군 예산 10억 원을 착복하였으며 정치계에 수천만 원의 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버림~ 그 결과 당시 이시영 부통령이 사표를 제출하였으며 다시 재개된 재판에서 김윤근, 윤익헌 등 국민방위군의 주요 간부 5명에게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됌...


(국민 방위군 사건 책임자들 처형사진.)

 

원래 군사재판은 통상 비공개 하에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당시의 국민여론의 관심을 반영하여 국민방위군사건의 재심은 결국, 공개재판으로 진행되었음. 그만큼 여론의 관심이 지대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징.

 

매우 안타까운 사건임.


결론 : 빨갱이 씨발련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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