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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찌아냐.. | 19/04/19 08:42 | 추천 92

나폴레옹 시신운반.jpg +1753 [16]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1122793021

루이14세 사후 앵발리드는 태양왕의 무덤으로 사용되지 못하였다. 본인은 이곳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결과적으로 선조들을 따라 생드니 성당에 묻혔다. 이후 앵발리드는 노트르담 성당과 함께 파리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군림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발발하기 전까지는 앵발리드는 별탈없이 보존되었다. 하지만 이성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앵발리드는 프랑스 전역에 불거진 집단적 광분을 피해갈 수 없었다. 앵발리드는 노트르담 성당과 함께 이성숭배의 장소로 사용된다. 종교를 혹세무민의 미신으로 폄하하고 이성만이 인간이 믿어야할 대상으로 여긴 그 당시의 사회적 풍조였다. 1792-1793년 앵발리드의 명칭은 승리의 신전으로 바뀌었다가 마르스의 신전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스 신의 명칭을 쓴 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이성숭배와 모순되긴 하지만 이 명명의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명칭이 바뀌었어도 앵발리드가 창건당시부터 가진 군사적 상징이라는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아마 혁명기에 앵발리드는 이성의 전파라는 명분으로 벨기에, 이탈리아를 침공한 혁명군의 군사적 위업을 기리는 공간으로 사용된 듯하다.

프랑스 혁명 당시 앵발리드 내 보관된 무기들을 약탈하는 모습이다. 이후 이곳은 이성숭배와 혁명군의 군사적 위업을 기리는 장소로 사용된다.


앵발리드의 운명을 또 한번 바꾼 사람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다. 1800년 제1 집정관일 당시 그는 앵발리드를 위대한 군인의 영모로 전용한다. 맨 처음 이장된 인물은 튀렌(Turenne, 1611-1675)이다. 튀렌은 루이14세 시절 여러 전쟁에서 대원수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가 세운 전공과 더불어 군인으로서 모범을 보인 그의 인품이 그를 더욱 위인으로 만들었다. 다른 프랑스인들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도 그를 존경하였다. 1808년에는 보방(Vauban, 1633-1707)을 이곳에 이장한다. 보방도 루이14세 치하에서 원수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전공보다는 축성과 공성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시대에 뒤떨어진 요새들을 17세기 시대적 흐름에 걸맞게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체제로 쇄신시킨 인물이다. 이 외에 나폴레옹은 여러 장군, 원수들을 이곳에 묻었다.


제 1집정관 시절인 1800년 나폴레옹은 앵발리드를 위대한 군인들의 묘역으로 탈바꿈시킨다.



1800년에는 루이14세 재위기 위대한 대원수인 튀렌의 묘를 이장한다.


1808년에는 역시 루이14세 재위기 원수이자 축성, 공성 분야을 진일보시킨 보방의 묘를 이장한다.


앵발리드가 지금과 같이 나폴레옹의 무덤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7월왕정이다. 7월왕정은 1830년 7월혁명으로 부르봉 왕조가 샤를 10세를 끝으로 완전히 전복된 이후 그 공백을 오를레앙 가(家)인 루이 필리프가 메꾸면서 세운 정권이다. 이 정권은 좀 독특한데 당시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프랑스 국민의 왕’이 정식 직위였다. 국민과 체결된 일종의 계약관계였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왕만 다른 인물로 바뀌었을 뿐이며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여겼다. 이윽고 파리시민은 유린당한 7월혁명의 정신을 소생시키기 위해 1832년 흔히 레미제라블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6월혁명을 일으킨다. 6월혁명은 실패하여 루이 필리프는 왕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로서는 급락한 자신의 인기를 되살릴 필요성을 느낀다. 이것이 앵발리드에 나폴레옹이 묻히게 된 배경이다. 1840년 수상(Pr?sident du Conseil)이었던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는 영국과의 협상 끝에 나폴레옹 시신을 반환받는다. 티에르 본인도 나폴레옹의 열렬한 지지자였긴 했지만 그보다는 당시 국내 상황을 타개할 정치적 목적으로 나폴레옹 시신을 이용한 것이다. 태평양 외딴 섬에 고립되었던 나폴레옹 시신을 반환받아 보나파르티스트 같은 국가주의, 민족주의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이었다. 티에르는 루이 필리프의 영광을 드높일 뿐만 아니라 본인도 국가주의 재상이라는 이미지를 굳히려는 의도였다. 사실 이전부터 이런 물밑 작업은 진행되었다. 6월혁명 이후인 1833년 방돔(Vend?me) 기둥 위 나폴레옹 동상을 복원하였고 1836년에는 나폴레옹의 유산이었던 에투왈 개선문을 완공한다.


루이 필리프는 1832년 6월혁명 이후 국민들의 지지가 급락하는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된다.



1840년 수상이었던 아돌프 티에르는 영국으로부터 나폴레옹 시신 반환을 성사시켜 국민들의 지지도를 회복하고자 한다.


사실 1840년 이전부터 나폴레옹을 7월왕정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1833년 방돔 기둥 위에 복원시킨 나폴레옹 동상이다. 현재는 앵발리드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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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7월 7일 루이 필리프는 그의 작은 아들인 주왕빌(Joinville)을 세인트 헬레나 섬에 파견한다. 주왕빌 곁에는 베르트랑(Bertrand), 구르고(Gourgaud), 라스 카즈(Las Cases), 맘루크인인 알리(Ali)와 같은 나폴레옹의 옛 부하들이 동행한다. 라스 카즈의 경우 그 당시 그가 눈이 멀고 병환인 관계로 그의 아들이 대행하였다. 3개월의 항해 끝에 주왕빌 일행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 도착한다. 8월 15일 섬의 지사였던 미들모어(Middlemore) 경으로부터 시신을 인도받는다. 이때 처음으로 영국에서 나폴레옹을 황제라고 불러준다. 시신을 꺼낼 당시 나폴레옹의 사체는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양호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옛 부하를 비롯해 주왕빌 일행은 이 광경을 보고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11월 29일 나폴레옹 시신은 사후 21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나폴레옹 시신은 셰르부르(Cherbourg) 항구에 도착한 후 라 벨 폴(la Belle Paule) 범선에서 라 노르망디(la Normandie) 배로 옮겨져 센느강 하구의 아브르(Havre)까지 운구된다. 아브르에서 쿠르브브와까지는 라 도라드(La Dorade)라는 특수 제작한 운구용 배에 의해서 옮겨진다. 기록에 따르면 센느강을 따라 파리로 향하는 동안 강변에는 노인이 된 옛 근위병들이 제복을 갖춰 입고 황제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며 차려 자세로 도열해있었다고 한다. 12월 14일 파리와 8km 정도 떨어진 쿠르브브와(Courbevoie)에 도착할 당시 1백만명에 육박한 프랑스인들이 운집했다고 한다. 군중들은 모두 “황제 폐하 만세(Vive l"Empereur)”를 외쳤다고 한다.


루이 필리프의 셋째 아들인 주왕빌(Joinville)이다. 그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 시신을 영국으로부터 반환받았다. 덧붙여서 쥬왕빌은 7월왕정 이후 망명다니다가 제2공화국 시절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의 대선에서 패배한다. 제2제정이 들어선 이후에는 미국으로 넘어갔다가 나폴레옹3세가 몰락 한 이후에 프랑스로 돌아온다. 제3공화국 시절 의원에 선출되기도 한다. 1900년 파리에서 우여곡절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나폴레옹 시신을 프랑스로 운반하기 위해 라 벨 폴 범선에 승선시키는 장면이다. 유젠 이자베이(Eug?ne Isabey)라는 화가 작품이다.



셰르부르(Cherbourg) 항구에 도착한 이후 라 노르망디 배로 관을 옮기는 장면이다. 라 노르망디는 센느강 하구의 아브르 항구까지 운반한다. 이 그림은 레옹 모렐-파티오(L?on Morel-Fatio)라는 화가가 1841년에 그린 작품이다.



아브르 항구부터는 파리에서 8km 떨어진 쿠르브브와(Courbevoie)까지 센느강을 따라서 라 도라드(La Dorade)라는 특수제작한 배로 운반된다. 황제의 관을 운반하기 위해 특수제작된 만큼 그 장식들에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쿠르브브와(Courbevoie) 부두 역시 황제의 관을 맞이하기 위하여 특별 플랫폼이 세워졌다. 사진과 같이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독수리 장식물이 눈에 띈다.


나폴레옹의 관이 쿠르브브와에 도착한 모습이다. 이후부터는 장례마차를 중심으로 성대한 운구행렬이 앵발리드까지 이어진다. 위 그림은 펠리 필리포토(F?lix Philippoteaux)라는 화가가 1867년에 그린 것이다.


12월 5일 아침 5시 앵발리드에서 예포를 울리며 운구행렬이 쿠르브브와 부근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날은 영하 10도의 아주 추운 날씨였다고 한다. 운구행렬 당시 관을 운반하는 장례마차는 그리스 신전을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며 10m에 육박하는 거대한 크기였다. 말 16마리가 끌었다고 한다. 나폴레옹 관은 그의 살아생전에 완성되지 못한 에투왈 개선문을 통과하여 콩코르드 광장을 지나 앵발리드에 도착한다. 앵발리드 마당에서 행렬은 루이 필리프 앞에 멈춰 섰으며 라 벨 폴 범선의 선원 36명이 관을 현관 앞으로 옮겼다. 이윽고 종교적인 장례의식이 시작되었다. 의식 때 모차르트 레퀴엠이 연주되었다고 한다. 의식 중에 거의 임종 직전인 87세에 이른 몽시(Moncey) 원수가 관 옆에 있었는데 나폴레옹의 검을 잡고서 “이제 서야 잠들러 오셨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는 일 년 뒤에 임종을 맞이한다. 참 신기하게도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 중일 때 나폴레옹은 측근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너는 언젠가 파리가 황제 폐하 만세로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장례마차가 에투왈 개선문을 통과하는 모습이다. 나폴레옹은 죽어서야 그가 염원했던 개선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장례마차는 카리아티드(cariatide)라 불리는 여인 기둥상으로 유명한 그리스의 에렉테이온 신전을 모방한 듯하다. 장막 한 가운데에 부착된 나폴레옹을 암시하는 N 이니셜 장식이 눈에 띈다.



사진과 같이 장례마차는 16마리의 말이 이끌었는데 황금빛 마구로 치장했다고 한다.




1840년 나폴레옹 관은 앵발리드에 도착하였지만 1861년 공식적인 황제의 영묘가 완성될 때까지 앵발리드 내 생-제롬(Saint-J?r?me) 제실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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