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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canic.. | 17:50 | 추천 32

[염전盧벨] 내 이름은 대식이가 아닙니다. +2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1553894166



대충 문짝 흉내만 낸 나무 판자 문틈 사이로 차가운 서해안의 바닷바람이 밀려들어왔다.

나름 추위를 피하기 위해 긁어모은 볏짚을 바닥에 깔고,

원래 무엇이었는지 모를 천을 짚 위에 올려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가을의 쌀쌀한 냉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문틈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해가 떠 오는 것이 보이자

한기를 밀어내듯 깊은 한숨소리와 마른 기침 소리가 밀려나왔다.

아니, 한기가 아니라 후회가 가득하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섬에 들어온 이후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늘 그 시작 장면은 영등포 근처의 인력사무소부터였다.

'...안한다고 했으면...안갔으면 어땠을까...'



마땅한 일자리도, 그렇다고 뭔가 특별하게 내세울만한 기술도,

마지막으로 몸뚱아리 하나라도 건강하면 좋았을텐데

비실거리는 몸을 보고 써 주는 현장은 없었다.



숙식제공, 가족같은 분위기...

3개월만 일하면 목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누가 요즘 최저임금도 안주겠냐는 말에,

이런 일자리 구하기 정말 쉽지 않고, 안하면 한동안 일 구해줄 수 없다는 밀어붙임에

멋쩍게 웃으며 서명을 했고 그 때부터 반 년이 넘도록 일했지만

통장은 커녕 가지고 있던 휴대폰마저 빼앗겨 누군가에게 연락을 할 수도, 신고를 할 수도 없었다.



"철컥 철컥"

"끼이이이이이"

멍하니 옛 생각에 잠겨있다 바깥쪽 자물쇠를 풀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괜히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몸이 움츠러드는 게 느껴졌다.

옆자리의 몇몇 사람들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튕겨지듯 일어나 겁먹은 눈빛으로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인쟈들 일어나서 일 가자잉"



오늘은 기분이 좋은가보다

평소에는 몽둥이를 들고 욕설을 퍼붓는것이 일상이었는데...

비틀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섬에 하나밖에 없는 다방, 거기에 아침부터 커피 배달을 온 '김양' 이 있었기 때문.



"어머 이 오빠는 처음 보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김양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에 나도 자연스레 눈을 흘기게 되었다.

춥지도 않은지 골지 나시 가디건, 그 사이로 보이는 까만 브라자

살짝만 바람이 불어도 팬티가 보일 것 같은 빨간색 짧은 치마. 스타킹도 신지 않은 맨다리...



나도 모르게 위아래로 김양을 훑는 사이

조용한, 그러나 싸늘한 '사장'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대식이 멀 그렇게 꼴아봐? 눈꾸녕을 확..."



평소의 '사장' 이었다면 당장 손에 잡히는대로 매타작을 했겠지만

오늘은 그렇게 바라던 김양과의 '티타임' 이라 그런지 매우 참는 듯 했다.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쫓기듯 흙 비탈길을 내려와 염전으로 가자

이미 와 있었던 다른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것이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다들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지만 이 안에서도 계급은 있었고

나처럼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은 염전 밀대로 하루종일 소금을 긁어모아야했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일을 시작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온몸에 땀이 났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아마 얼마 전에 몽둥이로 무릎과 허벅지를 맞아서 그런 이유도 한 몫 하리라.



욱신거리다못해 비명을 지르는듯한 몸을 힘겹게 이끌고

'맞지 않으려' 움직이는 시간이 지나자 금방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장' 은 마른 기침,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김양과 나타났고

옆에는 섬에 들어온 지 제법 된 사람이 솥단지 하나를 들고 있었다.

"여 모여들 보이랑게..고구마들 묵고 혀"



금방 삶아냈다기엔 너무 차가웠고

퍼석거리다못해 말라버린 고구마의 식감.

무표정한 모습으로 한두입 먹다 마는 모습에 '사장' 이 마뜩찮았는지

"어이..대식이- 표정이 쪼까 껄쩍지근하네잉? 뭐가 맘에 안드냐잉" 하며 입을 이죽거렸다.



순간 경직된 분위기, 싸늘하게 쳐다보는 '사장' 의 시선에

허겁지겁 고구마를 먹던 다른 사람들마저 먹는 것을 멈추고 시선을 땅으로 떨구었다.



전에도 비슷한 적이 있었다.

마른 멸치와 쉴 대로 쉬어버린 김치, 찬밥을 비벼 줬을 때도

눈앞이 번쩍 하더니 뜨끈한 피가 입 안을 온통 적셨더랬지.



이미 자리를 털고 일어난 사장은 근처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마 무엇인가 때릴 것을 찾는 것이겠지.



"아이 오빠!! 자꾸 분위기 이렇게 만들면 나 갈거야"



앙칼진 김양의 목소리가 차가운 분위기를 가르자 사장의 눈빛이 바뀌며

"오매 또 왜그럴까잉 우리 이쁜이가- 알긋서 알긋서-" 하며

허리와 엉덩이 그 사이 어딘가를 쓰다듬으며 달래고 있었다.



"대식이 느는 김양 아니었으믄 귀빵맹이를 쾈..대그빡에 똥배끼 안 든 놈아"

한참을 쏘아보던 사장은 잠시 시간이 흐르자 김양과 어딘가로 사라졌고,

이내 오후 작업이 시작되었다.



오후 작업이래봤자

시간만 달랐을 뿐, 하는 일은 같았고,

오히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아마 일하는 시간이 더 길어서가 아닐까.

아니면 아침에는 잠기운에 취해 일해서 그런게 아닐까.



단순 노동을 하면서는 잡생각이라도 해야 시간이 잘 간다.

하지만 섬에 들어오기 전처럼 어디가서 뭘 할 지, 뭘 먹을 지 하는 생각은 어느 순간부터 하지 않고

늘 하는 후회, 도망치는 상상을 주로 하고 있다.

아, 오늘은 김양의 몸매도 빼놓을 수 없겠다.



몇 시 인지는 모르겠지만,

서해안의 일몰은 금방 일이 끝날 것임을 알려주었고

어디서 놀다 무엇을 했는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타난 사장은 (아마 목적을 달성했나보다) 기분이 좋았는지

평소보다 2시간 더 일찍 일을 끝내주었다.



한 명씩 창고...아니 숙소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머릿수를 헤아리던 사장은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내 뒤통수를 가볍게 치며

"대식아 표정관리 하자잉?" 하고는 밖에서 문을 걸어잠궜다.



...

많이 맞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다들 말없이, 그러나 고단한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볏짚 위로 몸을 뉘였다.



하지만 나는 온전히 눕지 않은 채,

창고 벽에 기대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름은 대식이가 아닌데,

왜 사장은 자꾸 나를 대식이라고 부를까.

...이 전에 대식이라는 사람이 있던 걸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니 어떻게 됐을까.



한동안 이런 생각을 하다 

이내 낮에 본 김양의 몸매가 떠올라 한 쪽으로 돌아누워

오른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아마 이것이 그나마 내가 하고싶은대로 하는 행동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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