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게 실시간 커뮤니티 인기글
(1848682)  썸네일on   다크모드 on
INTP는_.. | 24/08/18 07:50 | 추천 32

김구에 대한 당시 미국 대사의 평가 +21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1546912971

이승만과 초대 미국 대사인 존 무초 (맨 오른쪽)

   

김구 암살 2주 뒤 주한미대사관은 미국무부로 발송한 3급 비밀문서에서 이렇게 썼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 주중 한국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김구는 6월 26일 오후 12시 20분 한국군 장교가 미제 권총으로 쏜 4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는데, 애국자로서 그의 명성은 무명의 일본인을 제거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부분적으로 획득된 것이다.

 

출처: Everett F. Drumright, “Political Summary for June, 1949” (1949. 7. 11) RG 319, 

      Entry 85A, Army Intelligence Document File, 194445 (ID File) no.577707, p.15

 

그로부터 한달 뒤인 8월 9일 주한미대사 무초는 안두희 재판관련 보고서를 국무부에 송부했다. 

이 보고서는 김구암살은 물론 김구에 대한 미대사관의 총정리 보고서였다. 

여기서 무초는 김구에 대해 더욱 냉혹한 평가를 한다. 

 

   김구는 암살자의 생을 살았으며, 아첨꾼과 암살자 친구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암살 당함으로서 모든 죽음 가운데 그가 가장 잘 이해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야심을 가진 사람으로 한국인 가운데 그 명성과 권위에서 이승만에 버금가는 인물이으며, 지난날 그의 야망이 좌절된 데에 매우 격분했을 것이다. 

   그의 성격상 권력을 되찾기 위해 가용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는 거짓일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기질적으로라도, 그가 좌익이 아니라 극우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현재 남한에서 야망이 좌절된 사실은 그로 하여금 불장난을 할 유혹을 갖게 만들었다. 

   아마도 사실 김구는 좌익과 연락망을 형성했을 것이다.

 

출처:  John J. 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 no.492 (August 9, 1949) Subject :  

       “Aftermath of the Assassination of KIM Koo ; the Trial and Sentence of AN Too  

        Hi” RG 263, Records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The Murphy Collection on International Communism 1917-1958, Korea, Box no.69

 

 

ㅡ보고서 작성자 존 무초ㅡ

무초는 1924년 함부르크에서 외교관생활을 시작했고, 1926년 홍콩 배속이래 중국에서 활동했다. 

그는 홍콩·雲南·福州 등지에서 근무했고, 1931년 2월 7일 7급 외교관으로 상해에 배속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히로히토 일본국왕의 생일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졌을 때 무초(John J. Muccio) 초대 주한미대 

사는 시라가와(白川) 대장, 요시다(吉田) 9사단장, 시게미즈(重光) 공사와 함께 귀빈석에 동석하고 있었다.


 미국 뉴욕주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운영과장인 조지 실리(George E. Cilley) 소령도 '실리 보고서'로 약칭되는 1949년 6월 29일자 '김구 암살 관련 배경 정보'에서 김구 암살의 불가피성을 지적했다.

보고서에서 실리는 김구가 반(反)이승만파 군인들과 함께 쿠데타를 계획했었다고 말했다. 김구 암살로 인해 그런 위험성이 사라졌으므로 미국의 남한 관리가 편해졌음을 강조하는 보고서였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48628

러시아로부터 받은 공산당자금을 임정에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임정내 김립같은 공산주의자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이봉창 법정진술
[문] 피고인은 올해 1월 8일의 흉행을 현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답] 나는 형무소에 수용된 후 불교 이야기를 듣거나 불교 책을 읽거나 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한 결과 나의 사상은 내가 사바 세계에 있을 때와 아주 다르게 변했습니다. 나는 김구(金龜)로부터 부추김을 받아 결국 그런 마음이 생겨 천황 폐하에 대해 난폭한 짓을 했습니다만 오늘에는 ?굳이 김구를 원망하지는 않으나 그 사람의 부추김에 놀아난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나의 어리석음으로 엄청난 짓을 해 참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948년 7월 김구의 예측 “북한군 남침, 남한은 망할 것”
북한군이 남침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전쟁이 없다’는 위선적 발언을 했고,

대한민국이 멸망하리라 예상했기 때문에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김구·유어만 대화 비망록’입니다.

?

유어만(劉馭萬·1897~1966)은 중화민국의 외교관으로 1948년 당시 주한 중국 공사로서 서울에 와 있었습니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지 두 달 뒤인 1948년 7월 11일 오전 11시, 유어만은 김구의 거처인 경교장을 예고 없이 방문했습니다.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밀명을 받았던 유어만은 이 자리에서 김구를 이승만정부에 들어가라고 설득하는 작업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김구는
 “내가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동기 중 하나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지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대응할 만한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인들은 비난 받을 새도 없이 손쉽게 남한을 급습하는 일에 그것(북한군)을 투입시킬 것이고, 지금 잠시 여기(남한)에 어떤 정부가 서고 있지만 (곧 소련에 의한)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신고하기]

댓글(0)

이전글 목록 다음글

제목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