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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010년 11월 17일....
요나라 성종은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맹렬한 기세로 남하하기 시작한다.
많은 이들이 고려와 거란과의 전쟁에서 1차 전쟁에서의 갓서희의 화려한 외교술과?
3차 전쟁에서의 강감찬 장군님의 워터파크 귀주대첩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고려가 가장 암울했던 2차전쟁 시기에 찬란하게 빛나던 두 장수들이 있었으니 바로?
양규장군님과 김숙흥 장군님이시다.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묘사되는 김숙흥(좌)과 양규(우)>
요나라 성종의 정예군은 물량과 기세로 고려를 사납게 침공하였으나 양규장군님과 휘하 부대는 흥화진에서
1주일 간 지속된 공세를 안정적으로 방어하며 적의 이니시를 현명하게 넘기신다.??
이에 빡친 성종은 항복한 고려 포로들을 통해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와 사자들을 보내지만........
'응 좆까 ㅗㅗ ^^'
(실제로는 요 성종이 예물까지 보내며 항복을 요청했으나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함)
<위 사진은 1차 여요전쟁 당시의 침입경로>
이에 요 성종은 적의 커멘드센터를 날리기 위해 약 20만의 대군을 의주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로대에 주둔시켜 후방을 도모하고 나머지 20만 병력들은 남하하기 시작한다.
당시 고려는 정변에 성공한 강조가 통주에서 적을 요격하기 위해 중앙군을 이끌고 대기중이었으나 요 성종의 본대에게 패하며 자신마저 목이 달아나며 고려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됨....
미안하다 우리 후손들아....ㅠㅠ
'고려 중앙군도 개박살났으니 이제 흥화진도 넘어오겠지?ㅎㅎ'라며 강조의 서신을 위조해
항복을 권유하는 요나라 성종......
응 ^^ 아니야 ㅎㅎ
이에 격노한 성종은 통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우주방어로 인해 뚫어내지 못하고? 결국 옆에 위치한 곽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6천의 수비군을 주둔케한다...
위 사진과 같이 곽주에 수비병을 남겨 최소한의 보급로 및 후방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으며 다시금 기세를 회복한 여진군은 신나게 남하하기 시작하지만....
??? : scv, ready!
??? :? 시발 이게 뭐야.....
상대의 노림수를 간파했는지는 모르지만 고려 조정은 남쪽으로 커멘드센터를 옮기며 (고급용어로 몽진이라고 함) 장기전을 기획하기 시작했고 요 성종과 그 휘하부대들은 나가리가 되기 시작한다...
곽주성을 함락시킨 기세로 개경까지 진군하던 거란군은 중간에 서경을 공격하지만 이마저도 함락시키지 못하는 가운데....
드디어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양규 장군이 이끄는 700의 결사대는 흥화진을 뛰쳐나와 통주까지 남하하여 1,000명 가량의?
군사들을 수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병력으로 곽주에 주둔중인 6천의 거란군을 몰살시키고 곽주를 탈환하게 된다....
이에 요 성종은 슬슬 미쳐가기 시작한다.... 고려의 커멘드센터는 계속 남하하여 항복을 받는 것도 기약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후방마저 털리면서 예전 수양제와 당나라 이세민의 꼬라지가 생각났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요 성종은 뚝심있게 나아갔고 기어코 고려의 수도 개경에 입성하여 성을 불태운다..... 하지만.....
고려 국왕은 현명하게 빤스런 하였고 적에게 후방을 위협받는 거란군에게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기에 결국 철수를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1011년 1월 17일. 요 성종은 고려인 포로 수만명을 끌고 청천강까지 북상하였으나
귀주에 주둔하고 있던 김숙흥과 중랑장 보량이 이들을 저격하여 거란군 1만명의 모가지를 득템하게 된다.
거란군이 정줄을 놓아가기 시작할 그 무렵..... 자로 잰 듯한 타이밍에 양규 장군 또한 거란군의 예비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무로대를 습격하여
거란군 모가지 2천개를 추가로 득템하고 고려 백성 3천명을 무사히 구출하게 된다.
(무로대에 주둔시킨 거란군의 숫자에 대해서는 뻥튀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그래도 후방에 꽤 투자를 하였을 것이기에 거란군은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두 장군들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두 장군들은 거란의 후미를 악마같이 집요하게 물고늘어지기 시작했고
이수에서 석령까지 거란군을 추격해 2,500명의 거란군을 쳐죽이고 고려백성 1,000명을 탈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흘 뒤에는 여리참에서 3회의 전투를 벌여 또다시 거란군 1,000명의 모가지를 획득하고 고려백성 1,000여명도 탈환하게 된다.
두 영웅들의 활약 덕에 고려는 서서히 전세를 회복해나가기 시작했다.하지만 거란군의 후미를 공격하다가 본대와 만나게 된다면 전멸을 각오할 수 밖에 없는
매우 도박적인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이들은 계속해서 적을 추격한다.
하지만.....?
1011년 1월 28일.양규와 김숙흥 장군은 애전에 거란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들을 습격하여
1,000명의 거란군 수급을 추가로 확보하게 된다.
순조로운 추격섬멸이 지속되나 싶었으나....
이 애전에 요 성종이 이끄는 친위군 본대가 당도하게 된다... 이미 거란군 부대와 지속적인 전투로 인해 피해가 누적되어있던 상태에서?
고려 군은 이전에 상대했던 거란군과는 질적으로 다른
거란군의 정예 친위군과 상대해야 했다...
치열한 난전 속에서 양규장군과 김숙흥 장군을 비롯한 모든 고려 병사들은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고처절하게 고국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 끝에 전원 전사하게 된다....
가까스로 양규장군과 김숙흥 장군의 영혼의 일격을 막아낸 거란군이였으나
이미 그 타격은 상상을 초월한 상태였고 게다가 큰 장마로 인해 군수물자들이 손상되어?
군사들의 컨디션까지 바닥으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이 때를 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흥화진의 수비대장 정성은 거란군 부대가 압록강을 반쯤
건너는 순간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결정타를 날리며 2차 여요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두 장군은 원군도 없는 상태에서 총 7번을 싸워 무수히 많은 거란군을 참살하고 고려백성 3만여명을 구출하는
무시무시한 전공을 기록하였다.
3차 전쟁에서 고려가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으로 여요전쟁을 마무리하기까지 이들의 공로는 결코 적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양규 장군과 김숙흥 장군, 그리고 휘하 고려 군사들에게?
그저 너무나도 감사할 뿐이다...
안녕하세요 ㅎㅎ
미갤에서 미스테리 자료 업로드 하면 '목도리무링요'입니다.
미스테리 자료만 올리다가 갑자기 국뽕이 차올라 발퀼로 한 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자료의 퀄리티는 좋지 않지만 여요전쟁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양규 장군과 김숙흥 장군들의 공로를
많은 분들이 아셨으면 하는 마음에 올려봅니다~!
댓글(25)
교과서 표현 '양규의 분전'
쥬시 저 분전이라는 두 글자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ㅠㅠ
아임서희 ㅈㅅ..
그림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ㅜㅜ
양규성님 사실상 구출 3만명이면 대도시하나 통째로 구해낸거
굉장히 존경하는 분들
얼마전에 한능검 공부하면서 양규는 알게됐는데 김숙흥은 첨 알게됐네요
교과서에도 이런거 실어주면 좋은데 한줄평임 교과서는
강조 아재...반정을 했으면 좀 기방을 잘하셨어야제..
김경손 결사대도 멋진뎅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