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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망아들.. | 21/09/17 19:30 | 추천 32 | 조회 2544

1990년식 31살 르망이야기 +481 [12]

보배드림 원문링크 https://m.bobaedream.co.kr/board/bbs_view/best/458906

안녕하세요! 예전에 내차소 시절에 몇번 올린 적 있는 르망인데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ㅎㅎ 오랜만에 돌아와서 또 한번 르망의 이야기를 써보려 합니다. 일기처럼 쓰다보니 경어체가 없는 점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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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는 장남인 우리 형보다 나이가 많은 31년을 함께한 자동차가 있다. 아빠의 첫차이자, 장애자 표시를 붙히고 다니며 아빠의 불편한 왼쪽 다리를 대신해줄 든든한 다리였고, 우리 가족이 아플 땐 엠뷸런스였고, 나를 업고 다니며 키워줬고, 19살 갓 면허를 딴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준 선생님이며, 우리 가족의 모든 추억을 함께한, 사람만 아닐 뿐 그저 이동수단이 아닌 우리 식구인 르망이다. 지난 7월 갑작스레 아빠가 세상을 떠나며 르망도 주인을 잃었고, 발인날 영구차가 집앞을 들러 아빠가 반평생을 아끼며 함께한 르망의 운전석에 잠시동안 아빠의 영정을 모시고 나도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아빠를 보내고 남은 우리 가족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바쁜 일상을 보냈고 나또한 다시 철원으로 돌아와 바쁘게 지내다보니 르망이 너무나 그리워서 르망을 내곁에 데려오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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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이른 새벽부터 내차를 타고 철원에서 출발하여 대구까지 바쁘게 달려왔고 도착하자마자 집에도 안들어가고 르망의 시동부터 걸어보았다. 건강하게 기다렸길 기대했고 매번 일발시동이던 르망이지만 아빠의 빈자리를 티내듯 틱,틱, 소리만 나고 완전히 방전되어있었다. 트렁크에 있던 점프선을 꺼내어 바로 점프를 댔더니 힘겹게 시동이 걸리면서 잠시동안 매케한 배기가스도 뿜어내는 모습에 마음이 많이 아팠다. 한시간 정도 공회전을 돌린 후 시동을 꺼두고 가족들이랑 알페온으로 오랜만에 아빠 산소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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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일어나서 또 시동을 걸어봤다. 잘 걸려있더니 멀쩡하던 알터네이터가 빨리 전기공급을 못 했는지 걸어둔 시동이 혼자 푸드덕대며 꺼져버리기 까지 한다.. 다시 시동을 걸려니까 셀프모터가 힘없이 돌길래 악셀을 꾹꾹 누르면서 거니까 겨우 시동이 걸린다.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 바로 내가 몰고 주차장을 나가 고급유를 먹이러 갔다. 이날 르망은 31년 평생동안 일반유만 먹다가 난생처음 고급유를 먹었다. 저속에서 약간 있던 노킹마저 사라지고 쭉쭉 미는 힘이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나도 나름 20년 넘게 옆에 타고다닌 르망이기에 절대 플라시보가 아닌 확실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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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유를 먹이고 바로 자동세차를 들어갔다. 손세차를 해주고 싶지만 바쁜 일정과 당장 앞이 안보일 만큼 뿌연 오염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블세차를 돌려주고 남은 물기는 정성스레 타월로 닦아줬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족, 친구들이나 주변 모든이들이 이걸로 철원까진 무리지 않냐, 위험하지 않겠냐, 만류를 하지만 나는 계속 내가봤을땐 철원까지 가고도 남을 상태라며 자신있다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했지만 멀쩡한 르망이 환자취급 받는 기분이라 마음이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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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까지 달리기 전 이미 마모한계선에 다다른 타이어를 교체하러 예약해둔 카센터에 왔다. 나이가 많은 차다보니 괜히 뭐하나 부러지면 사장님도 당황스러우니 휠캡은 내가 빼드렸다. 여분은 갖고있지만 그래도 이젠 구할래야 구할 수 없는 휠캡이라 너무너무 소중하다. 하체를 살펴보니 31년이 지나도 배기라인 빼고는 어디하나 겉녹조차 나지않았다. 세삼 아빠의 정성이 느껴졌고 눈안오는 대구에서 지냈다는게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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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백테타이어만 골라끼던 아빠였고 또 그만큼 르망과 백테타이어는 너무 잘어울렸는데 어느샌가 사라지면서 구할 수 없어서 아쉬운채 일반타이어만 쓰면서 근 20년을 지내왔다. 하지만 이번에 올해 생산된 백테타이어를 구하게 되어 내가 미리 주문을 해놨었다. 르망이 다시 백테타이어를 장착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아빠가 정말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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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인 16일, 철원으로 가는 날이다. 가기 전 드디어 상속이전을 마쳤고 1인신조의 르망은 나에게 이전되며 1인신조인듯 아닌듯 되어버렸다. 이 번호판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온 가족의 머리속에 르망은 언제나 초록번호판 이었기에 정말 어떡해서라도 유지하고 싶었고 그 바램을 이뤄내어 너무나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으론 르망은 언제나 아빠찬데 내차가 된다는 현실이 씁쓸하고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대구직할시 시절에 아빠 앞으로 최초 등록된 르망과 함께 늙어간 등록증은 절대 버릴 수 없는 소중한 문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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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챙겨주신 밑반찬, 내가 가져갈 짐들, 르망과 관련된 집에 있던 모든 부품, 서류, 책자, 카탈로그 등등 다 챙겨서 트렁크와 뒷좌석을 가득 채우고 심지어 내가 쓸 전기장판까지 우겨넣었다. 가야할 길도 엄청먼데 짐까지 가득 실으니 노인 학대하는 기분이라 미안했지만 뒷모습은 언제나 나를 보며 웃어주는 것 같다. 막내아들 차 든든하다며 같은 GM이라 그런지 핸들감각도 르망이랑 비슷하다고 가끔씩 내차를 몰며 맘에든다 하셨던 내가 아끼는 알페온이지만, 알페온이 채워줄 수 없는 르망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나 컸기에 알페온을 대구에 두고오는게 전혀 아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추석지나면 형이 알페온을 철원까지 갖다주기로 했기에 며칠뒤면 만난다는 생각이라 더 마음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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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가득히 싣고 집을 나서 서대구 톨게이트를 향해 간다. 31년의 나이와 37만km의 누적 주행거리, 심지어 이 차는 이번 주행이 태어난 후로 가장 멀리가보는 주행이다.. 그리고 최근 몇년간 아예 고속도로도 탄적 없고 100키로 까지 밟아본지도 너무 오래됐다.. 솔직히 아무리 관리 잘했다지만 나도 걱정이 안된다면 거짓말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운전자가 몸이 편안한 차는 아니기에 나도 너무 힘들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건 아빠가 에어컨은 엔진에게 해롭기만 할 뿐이다 라는 생각으로 이 차를 오래타려고 이미 아주오랜 옛날에 냉매를 다 빼고 에어컨을 안쓰던 차량이다. 나또한 앞으로도 르망으론 에어컨을 쓸 생각이 없다. 그렇지만 고속도로라 창문도 못 열텐데 더우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엄청했다. 이런저런 오만가지 걱정을 하며 퇴근시간으로 꽉꽉 밀린 17시 30분쯤 남대구 톨게이트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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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않고 계속 달리다보니 벌써 서여주 휴게소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경이로웠다. 생각보다 너무 잘 달려줬고, 날씨또한 시원해서 외기유입으로 송풍만 돌려도 엄청 시원했고 90~100키로만 유지하다가 간간히 추월하려고 가속할땐 나이와 누적 주행거리는 의미없단걸 느끼게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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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차랑과는 다르게 6,000rpm에서 레드존이 시작되고 3단 오토미션 때문에 80키로로만 달려도 2,800rpm을 유지하고 SOHC 엔진이기에 혼자서 죽어라 열일하는 늙은 캠샤프트.. 이대로 약 360km 거리의 철원까지 달리는게 너무 가혹하진 않을까 싶어 엔진룸을 열어봤지만 엔진 소리도 너무 부드럽고 그 흔한 오일 소모조차도 하지않아 너무나 대견하다. 걱정을 내려놓고 목적지 까지 가는길에 고급유를 취급하는 주유소는 하남드림휴게소 밖에 남지않아 경유지로 설정하고 다시 출발했다. 하남에 다와갈 쯤 제자리에 서다시피 길이 막힌다. 요즘차와 다르게 수온게이지가 꼭데기를 찍으면 그제야 라디에이터 펜이 돌면서 엔진을 식히는 방식이다. 쭈욱 달릴 땐 괜찮지만 가다서다 해버리면 정말 가혹하다.. 그래서 이만큼 했으면 됐다, 여기까지 날 데려다 준 것만 해도 너무고맙다, 이젠 힘들면 퍼져도 되고 퍼지면 카캐리어를 불러서라도 데리고 갈테니까 온힘 다하지 말라며 마음속으로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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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드림휴게소에서 고급유 가득이요! 했는데 20리터밖에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계기판상 연료가 4/1정도 있긴했고 연료탱크 용량이 작은 차량이긴 하지만 알페온 3.0을 타던 나에겐 놀라운 연비였다. 꽉꽉 막히던 서울 근교를 빠져나와 남구리ic에서 구리포천 고속도로를 올랐고 이때부턴 이미 걱정은 싹 다 사라졌다. 무조껀 집까지 갈 수 있으리라 확신했고 마지막 졸음쉼터인 소흘 졸음쉼터에서 앉아 쉬며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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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철원군 경계지점이다. 대구 번호판을 단 르망이 철원에 오다니 신기했다. 17시에 대구집을 나와서 23시가 다되어 여기까지 도착했다. 요즘차량에 비해 전조등도 너무 어두워서 걱정이었는데 가로등이 워낙 잘 돼있고 주변에서 차량들이 같이 달려줘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르망은 자기가 업어키운 나를 집까지 아무일도 없이 무사히 데려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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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기 내 곁에서 르망은 그간 우리 가족과 아빠를 위해 한없이 고생해준 보상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걸 해줄 것이고, 가장 큰 계획은 군데군데 세월이 느껴지는 흔적은 잃고싶지 않기에 위 카탈로그 속 사진처럼 흰색 투톤으로 도색이 아닌 랩핑을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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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땐 한없이 커보였고 차안에서 일어서도 될만큼 넓은 르망이 나를 잘 키워준 덕에 이젠 나한테도 작게 느껴지는 르망이지만 세월의 흐름에도 항상 곁에 있어줘서 너무 고맙고, 그리운 아빠의 채취를 가득 갖고 있어줘서 너무 고맙고, 가족의 일부였던 르망이 이제 나에게는 아빠와도 같은 존재가 되어줘서 너무 든든하다. 이 먼길을 올 수 있었던 것에 아마 아빠의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었지 않을까 싶어 아빠에게도 감사하고 이제 르망도 고생 그만하고 나랑 같이 행복했으면 좋겠고, 내가 해줄 작업들을 맘에 들어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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