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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바이드.. | 24/09/11 20:46 | 추천 19 | 조회 45

사실 암살 당할만해서 암살 당한 사람.history +45 [13]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760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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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국내에서는 동인지 수준의 개소리 모음집 '로마인 이야기'의 영향으로 과도하게 미화되고는 한다.


사실 워낙 우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고 굳이 학교에서 많이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이라서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카이사르가 계속 억까를 당해서 어쩔수 없이 들고 일어났다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권력욕 보다 로마를 구하려는 구국의 결단을 내린 개혁가로서 묘사되는데,


실제 카이사르의 행적을 살펴보면 전혀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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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일 먼저 내전을 일으키게 된 경위부터가 무고한 억까하고는 거리가 먼데,


카이사르는 갈리아전쟁 이전에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치명적인 탈법행위를 저질렀다.



첫번째로 민회에서 법안을 표결하는 가운데 호민관의 거부권 행사를 무시하고 입법을 강행했고


두번째로 호민관의 거부권 행사와 동료 집정관의 민회참석이 폭력으로 저지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방관했으며


세번째로 애초에 민회에서 법안표결을 강행한 이유도 원로원에서 토지개혁 법안이 필리버스터 당하자 원로원 의원을 체포하려고 하다가 폭군이라고 욕을 처먹어서였다



이런 불미스러운 행적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가 무사했던 이유는


첫번째로 그가 갈리아 속주 2개+일리리아 속주 총독직을 역임하면서 불기소 특권을 유지받았기 때문이며,


두번째로 이 기간 도중에는 카이사르가 나중에 내전에서 숙적으로 싸우게 되는 폼페이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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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내전 직전에는 중앙정계에서 그를 지원해주던 폼페이와의 관계가 끊어진 시점이였고,


그렇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에 대한 공식적인 기소움직임이 활발했다.


카이사르도 앞서 언급한 행위들로 기소당할 경우에는 유죄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총독직을 쥔 상태에서 불기소특권을 유지받으며 집정관직에 출마하기 위한 특별법을 위해 로비했다.

(당연히 엄청난 뇌물이 뒤따랐다)



애초에 총독직을 10년이나 그것도 무려 3개 속주의 총독직을 겸직한 것 자체가 특권에 가까운 일이였다.


내전을 일으킬 당시에 카이사르는 평생동안 공화정 하에서 권력을 충분히 만끽해왔으며,


내전직전에도 자신의 정당한 법적권리만을 주장했는데 뺀찌를 먹은 상황은 아니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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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그냥저냥 정치인들의 술수라고 넘길수도 있겠지만 당연히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특별법 로비 성공 이후에도 총독직 임기 만료시기를 두고 계속 갑론을박이 벌어졌는데,


이때 파르티아의 준동으로 동방에 2개 군단을 증파해야 되는 일이 터진다.



이때 카이사르의 1개 군단, 폼페이의 1개군단 이렇게 차출되기로 합의되었는데,


이에 폼페이가 '나는 카이사르에게 빌려준 1개의 스페인속주 군단을 보내겠다'라고 발표한다.


이 스페인군단은 갈리아전쟁이 최대 위기에 봉착했던 시기에 폼페이가 빌려줘서 잘 써먹었고 이제 전쟁도 끝났으니 불합리한 주장도 아니였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아예 합의안을 뒤집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스페인 방위를 맡아야되는 스페인 군단에 직접 찾아가 월급인상과 노예지급으로 충성맹세를 받아낸다.


전직 국가원수이자 현직 총독이 정부에 지시에 불복하는 집단 무장탈영을 종용하여 성공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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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떠나서 장기적으로도 치명적인 실책을 벌이는데, 바로 갈리아 전쟁 내내 일리리아 속주의 통치를 방기한 일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이탈리아만 왔다갔다하면서 갈리아 전쟁을 수행하느라 일리리아는 거의 10년 동안 신경쓰지 못했는데,


갈리아 전쟁이 절정으로 치달을때 일리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카이사르는 아예 일리리아 군단들을 전부 멋대로 철수시키고 갈리아로 불러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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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내전까지 겹쳐서 일리리아 속주는 무려 20년 동안 로마의 통제에서 거의 벗어나버렸다.


카이사르는 죽을때까지 일리리아 속주가 아예 이민족의 침공을 받는데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거의 20년이 지나 2차 삼두정이 수립된 기원전 33년 즈음에 옥타비안(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에 의해 어느정도 수습된다.



일리리아 반란진압은 어찌나 개싸움이였는지 로마측 기록은 별로 남아있지도 않으며,

(로마의 역사가들은 유력정치인들의 후원을 받아 역사책을 집필하는 경우가 많아서, 지지부진하거나 패전한 경우엔 기록이 급격하게 부실해진다.)


처음엔 1년으로 계획된 전쟁이 3년 넘게 질질 끌다가 개별 평화조약만 30건 넘게 체결되서야 마무리 된다.


이때 옥타비안은 황제도 아니였고 동방에서 건재했던 안토니우스와의 경쟁을 위해 대중에 내세울 군공이 절실 했음에도


일리리아 평정 이후에 제안된 개선식조차 마다할 정도로 지리했던 진흙탕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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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정수립 이후에도 로마의 일리리아 속주에 대한 통제력은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고,


40여년 뒤에 무려 20만명 이상의 일리리아 반란군이 들고 일어난 바토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완전히 수습되게 된다.


바토전쟁 당시에 이탈리아 해안지방과 북부 이탈리아가 위협에 노출되어 징집령이 선포되고, 모에시아 등의 이웃 속주가 침공당했으며,


진압군이 무려 10만명 이상 동원되고 나서도 4년 가까이 치열한 전쟁이 이어진다.


전쟁 중반기에는 무려 5개 군단이 늪지대에서 반군의 포위망에 갇혀서 전멸위기에 처했었을 정도.

(참고로 그 유명한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전멸한 군단이 3개에 불과하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과 내전 때문에 여력이 없어서 신경을 못쓴거고,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반란초기에 관리할 기회가 충분했음에도 멋대로 모든 일리리아 군단을 전용한 대가를 수십년 동안 치룬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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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 아니라 내전기간~내전 승리 이후에도 카이사르의 행적은 권력욕에 매우 충실했다.


일단 내전초기에 로마에 입성한 후 제일 먼저했던 일이 국고를 약탈한 일이였다.


이때는 선거조차 없었기 때문에 누가봐도 그냥 군벌이 사병을 이끌고 정부기관을 공격한 모양새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당연히 호민관 한명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직접 살해협박으로 끌어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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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승리 이후에는 권력욕을 숨기려고조차 안해서,


원로원에 왕좌처럼 보이는 휘황찬란한 권좌를 들여놓고 거기에 앉아있거나,


국가원수인 집정관들이 접견하려고하자 문밖에 세워두고 대놓고 무시하거나,


카이사르를 왕이라고 연호한 사람들을 호민관들이 체포하려고하자 오히려 호민관들을 멋대로 국외추방해버린다.

(당연히 카이사르는 공식적으로 왕을 자칭하지도 않았고, 로마는 '아직' 공화국이였던 만큼 체포시도는 정당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매우 심각한 국기문란인데, 호민관은 엄연히 평민정부의 수반이자 선출직이다.


로마 원로원에 대한 대표적인 역사적 비판들 중에 하나가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의 신체불가침권을 침해하고 멋대로 살해해버린 일이란 것을 생각해보자.


근데 카이사르는 선거로 선출된 정부수반을 아무런 법적근거 없이 해임시켜버리고 국외추방까지 시켜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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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결국 이렇게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다가 암살당하는데,


국내에서는 괴상하게 용서해준 정적들만 모여서 카이사르를 암살했다고만 알려져있다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암살을 모의한 주요 거물급 인사들 중에 상당수가 유년시절 부터 카이사르와 친구였거나,


갈리아 전쟁 복무부터 시작해 내전기까지 카이사르파로 참전한 카이사르파 인물들이였다.

(카스카, 데시무스, 트레보니우스 등)



데시무스의 경우에는 갈리아 전쟁의 최종장인 알레시아 전투에도 참전했으며,


내전기에 폼페이를 지지한 핵심도시인 마살리아(마르세유)를 함락시켰을 정도로 골수 카이사르파였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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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암살에 이렇게 핵심 지지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카이사르의 노골적인 권력욕에 실망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수 없으며,


아무리 좋게 봐줘도 서양의 조조(난봉꾼이였던 것도 비슷하다.) 수준의 간웅으로 봐야만 한다.



누가 뭐래도 카이사르는 권력욕에 충실한 삶을 살아왔으며, 그 권력욕을 위해서 때로는 국익을 해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근대 이후 서구에서 어떤 인물을 '카이사르'라고 표현하면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야심이 있는 사람,


더 나아가서 아예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란 뜻을 깔고 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


미국의 경우에 이러한 용법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를 일컫는 '아메리칸 시저'이며,


최근에는 도널드 트럼프를 '아메리칸 시저'라고 부르기도 한다.



카이사르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제쳐두고서라도, 


카이사르를 '로마인 이야기'에서 묘사하는 구국의 개혁가로만 파악하는 행태는 시대에 뒤떨어진 위험한 용비어천가이자 역사왜곡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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