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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색이야.. | 24/09/09 18:52 | 추천 11 | 조회 8

KV)괴문서) 제자와의 문답 +8 [6]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7575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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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 나가면 사제관계가 되자.

 처음 들어왔을 때 아름다움에 눈이 멀었던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다.

 이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바보 같았던 것에 기대했다.

 

 “시를 좋아하셨나 봐요.”

 “좋아하지만, 따로 찾아서 읽어볼 정도는 아니었어.”

 

 나는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봤다.

 새하얀 머리에 라벤더를 끼얹고 살짝 섞은 뒤 머리를 올리고 비녀로 마무리했으며, 백옥같이 뽀얀 피부에 윤기가 넘치지만, 특유의 죽은 눈을 하는 그녀.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무심코 시선을 뺏기고 만다.

 

 “또 저를 보셨네요.”

 “티나?”

 “둘밖에 없는 서고에 티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이유가 더 궁금하네요.”

 “멍청한 질문이었네.”

 

 내가 혀를 차자 그녀는 웃었다.


 “여전히 제 이름은 외우지 못하셨고요?”

 “외웠어.”

 “그럼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녀는 작문을 위해 책을 몇 권 꺼내 내 앞으로 슬쩍 밀어줬다.

 

 “기어이 내게서 시를 듣겠다는 거야?”

 

 나는 아무렇지 않게 주제를 돌렸다.

 부디 그녀가 걸려주길 바랐고, 그녀는 하품하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스승님에게서 직접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그러게.”

 

 분명히 말해야 했다.

 나는 너의 스승이 될 수 없다고.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잘못된 곳에 와버린 사람이라고.

 어쩌면 그녀의 스승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이뤄져선 안 될 희망 사항이다.

 

 “책만 가득한 고서 속에 몇 없는 친구들과 파묻혀 죽을 날을 기다리는 저랍니다. 다시 찾아올 리 없는 사람에게서 새로운 걸 배운다면 그건 곧 제 스승이겠죠.”

 “그렇게 얻어낸 스승은 몇 명이지?”

 “한 분도 없답니다.”

 

 그녀의 대답은 차가웠다.

 세상의 빛을 시인하지 못하고 책과 꿈에 파묻혀 지내왔던 만큼, 차갑고 냉랭하면서도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가지고 놀고 버리기 좋은 장난감에게 누가 마음을 줄까요?”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어쩌면요.”

 

 그녀의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날카롭게 변했다.

 세상에 대한 미련과 증오 어쩌면 질투로 가득했다.

 

 “완성될 리 없는 초고만큼 쓸모없는 것도 없는 법이죠.”

 “완성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소녀에게 기대를 품게 하는 건 죄악이랍니다.”

 

 그녀는 벌이라며 작문 책을 하나 더 꺼내서 내게 건네줬다.

 오늘은 기어코 내 입으로 시를 낭송하게 하겠다는 것 같았다.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잖아요, 스승님?”

 “더 정확히는 어제가 마지막이었어.”

 “그렇다면 하루만 더 제자의 어리광에 어울려주지 않으시겠어요?”

 “나 말고도 다른 손님이 찾아올 거야.”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라지겠죠.”

 

 그녀는 최대한 나의 죄책감을 이용했다.

 어떻게든 나를 하루라도 더 이곳에 붙잡고 즐겁게 지내려는 것 같았다.

 

 “원한다면 뭐라도 드릴 수 있답니다?”

 “그 무엇이 대가라도 시간을 더욱 늘릴 수는 없어.”

 “마지막 장을 먼저 읽어도요?”

 

 그녀는 작게나마 탄식했다.

 그리고 다른 작문 책을 더욱 올렸다.

 이쯤 되니 작문 책의 크기가 거의 사람 하나 크기만큼 쌓이고 말았다.


 “이걸 다 읽으라고?”

 “, 소녀의 마음을 농락하시고 처참히 짓밟으신 대가랍니다.”

 “너무한데.”

 “10일간 제 이름조차 외우지 못한 분에겐 무슨 말을 전해드려야 할까요?”

 “좋아. 시작해보자.”

 

 더는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그녀의 말을 따라주기로 했다.

 어차피 작문 책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다만 이걸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것들이 많았다.

 나는 신데렐라처럼 종이 울리면 돌아가야 했고, 그녀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정을 주지 않으려는 건가.’

 

 처음은 그녀에게 기대했다.

 아름다움과 추억에 이끌렸던 만큼 누구보다 다가가 새하얀 이야기를 섞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 위를 보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리석네.’

 

 나 자신이 너무 한탄스러웠다.

 이럴 거면 차라리 기대를 품지 말았어야 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어졌다는 걸 알고 있으니 다른 방법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책 속에 파묻혀 얼굴을 가린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이 마지막이고, 마지막일 거라 생각하자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대화해야겠지.’

 

 하지만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내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저쪽에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말씀하시길.”

 “정말 티 나는 모양이네.”

 “종일 말씀드렸지만, 스승님의 눈길은 따가운 편이라 어떤 책을 읽어도 바로 느껴집니다.”

 “사람들과 얼마나 만나봤어?”

 “한 손으로 충분할 정도입니다.”

 

 그녀는 책을 덮었다.

 이 주제로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걸 표현했다.

 나도 굳이 벌집을 건드릴 생각은 없으니 조용히 있었다.

 

 ‘불편하네.’

 

 학생이었다면 다양한 거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학생도 아니고 서로 아는 것도 얼마 없으니 제대로 이야기할 것도 얼마 없었다.

 책과 시로 이야기는 했지만 얼마 안 가 막혀버렸다.

 

 ‘내가 그렇게 잘 아는 편이 아니야.’

 

 나는 국어 시간에 읽었던 시와 가끔 추천받았던 시집을 읽은 게 전부였지만, 저쪽은 심심하면 시를 읽고 쓰는 괴물이었다.

 결국, 서로 원론적인 대화만 오가다 멈췄다.

 나도 다음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냥 바라봤다.

 특별한 방법도 없으니 그냥 바라보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차라리 정말 데려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아이를 데려가고 만다면 나머지 모든 것들이 무너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숨을 참았다.

 

 ‘빌어먹을.’

 

 시간이 됐다.

 나는 떠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이게 내 마지막 고민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냥 말없이 사라져주는 편이 더 좋겠지.’

 

 서고에서 나가는 길은 모른다.

 하지만 잠깐 방황하는 것 정도야 괜찮았다.

 조금이라도 이곳에 있어 주고 싶기도 했다.

 

 ‘손이라도 흔들어줘야지.’

 

 내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잿빛으로 물든 눈은 나를 가늘게 바라보며 책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물었다.


 “그대도 함께

 눈물 섞인 바람을

 지새워주길.”

 

 그녀는 내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는 저주나 다름없는 그녀의 말에 원망조차 쏟아내지 못했다.

 첫눈에 보고 이끌려 멋대로 왔던 건 나고, 돌아가야 할 걸 알면서도 대화를 했던 것도 나다.

 그렇기에 제대로 답해주기로 했다.

 

 “그대와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내게도 묶여있는 것들이 많으니

 그대에게 언젠가는 마음을 답해주리.”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다양한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이걸로 더 이상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이제 와서 학생이 될 수 없겠지만.’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 이에게 남겨진 것들은 너무나도 슬픈 것이었다.

 차라리 정말 데려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될 만큼, 어떻게든 다음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니 내용을 다음으로 기약했다.

 

 ‘이제 시를 읽는다면 언제나 네가 먼저 떠오르고 말겠지.’

 

 작게 조각난 것들을 끌어모아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등 돌렸다.

 분노할지언정 이런 씁쓸한 이야기는 바라지 않았었다.

 '언젠가'라는 공허한 거짓말에 모든 걸 숨겼다.

 

 ‘그리고 마침내 행복해지길 인가.’


 좋아하는 대사였지만, 이번만큼은 싫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위해 마지막까지 좀 더 어울리는 것을 고르기로 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소녀가 그리워집니다.

 서고 안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그녀를 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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