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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룡 .. | 22/08/16 00:25 | 추천 6 | 조회 51

말딸) 괴문서) 하늘 높고 우마무스메 살찌는 어느 가을날 +51 [2]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58246659








초가을ㅡ하늘은 높아 맑은 바람에 실려 올라간 구름도 몇 점 없이 유유히 흘러가고, 수확철 맞아 각지에서 엄선되어 올라온 각양각색 식자재들이 다함께 윤기 뽐내며 지나가는 우마무스메들의 발걸음을 붙들어 놓거나 이에 그치지 않고 뱃속으로 빨려들어가선 어제의 자신을 원망하며 눈물과 함께 더트 코스를 뛰어다닐 만큼 말캉한 살집으로 화하는 계절.

그런 계절에, 카페테리아에서는 어김없이 우적우적 후르륵 꿀꺽, 사정 모르는 누군가가 들었다면 아귀지옥이 이곳이리라 생각하며 냅다 줄행랑을 놓을 만한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트레센 사정 모르는 신입 우마무스메나 신입 트레이너 있어 대관절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궁금한 마음에 카페테리아를 들여다보았다가는 대경하여 뒤로 넘어갈 것인데, 첫째 이유는 식탁에 산만큼 쌓여서는 기껏 그렇게 올려쌓인 위세 한 번 자랑 못하고 빠르게 줄어가는 각종 음식들일 것이며, 둘째 이유는 그것들을 문자 그대로 전부 박살내다시피 뱃속으로 쓸어넣고 있는 이가 그저 회색 머리칼을 지닌 우마무스메 단 한 명이라는 것일테다.

"아따 가시내야 이 또 가을이라고 살판났네. 니 지금 23만엔어치 뭇다카대. 방금 삐뽀차 소리 들었제? 주방장 링게 맞음서 실려갔으이 고거이 마지막 그릇이여. 요것이 우마무스메인지 때지무스메인지 내는 도통 모르겠다. 이 몰캉몰캉 한 기 영락읎이 아 밴 새댁이고마. 멫 개월이요? 아나 마늘된장이랑 다마네기 티김."

음식을 쓸어넣고 있는 회색 머리칼 우마무스메 옆에 자연스레 앉은, 마찬가지로 회색 머리칼을 빛내는 체구 자그마한 우마무스메가 볼록 튀어나온 배를 쿡쿡 찔러대다 걸쭉한 사투리와 함께 실없는 딴죽을 넣는 모습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것을 보니 한두 번 있던 일은 아닐 것이리라. 과묵한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을 건네면서 팽팽한 뱃살을 북 치듯 한 번 퉁 두드린 타마모 크로스는 무즙 얹은 꽁치구이를 으썩 베어물고 와사비 풀어낸 장국에 적신 쫀쫀한 소바 가락을 후르륵 빨아올리기 시작했다.

"응……약간 과식했을지도 몰라. 햇채소랑 햅쌀이 맛있어서 그만. 가을은 좋은 계절인 것 같아, 타마."
"봄에는 모찌 맛있다고 백서른두개를 집어묵고, 여름에는 수박 잘 익었다고 일곱 통을 퍼묵고, 가을에는 햅쌀 맛나다고 밥통을 작살내고, 겨울에는 다이야끼에 다꼬야끼에 머 묵을것만 있으모 춘하추동 할 꺼 없시 다 니 시상이제이 머 새삼시레."
"음."

여하간, 오구리 캡은 가을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 배부르다. 오구리는 후식 묵나?"
"응. 아까 보니까 초콜릿 분수가 있던데."
"사과 깎아서 드릴까요~ 오구리 쨩 아ㅡ앙~"
"이 가시내는 어디서 티나왔노. 이러다 이나리도 나오게 생깃고마. 암턴가네 메지로네 아가야가 다 묵기 전에 내 멫 개 가올게 지둘리허븝"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슈퍼 크릭이 제 입에 콱 쑤셔박은 토끼사과를 우물거리며 디저트 코너의 초콜릿 분수로 향해 메지로 맥퀸과 사투를 벌이고 바나나 세 개를 겨우 건져 돌아온 타마모는 그 사이에 둘 늘어난 일행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너덜너덜해지면서 바나나 세 개를 가져왔더니 입이 다섯 개로 늘어있을 건 뭔가.

"아따 머스마들 느려터져서 묵을 복도 읎네. 이건 우리 빠나나여. 니들 건 알아서 가온나."

늘어난 일행 둘 중 키가 크고 얄쌍한 쪽, 오구리 캡의 트레이너가 타마모를 보며 가볍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 타마, 건강하지? 조만간 오구리랑 병합 훈련 잘 부탁해."
"오야. 우리 오구리랑 함 지대로 뛰보께."
"아~따, '우리 오구리~' 겉은 소리 암찮게 하는 거 보니 아가씨 둘이 벌써 달달~혀. 내는 쌔빠닥 달아서 커어-피나 마셔야 쓰겄어. 초코바나나는 타마 자네가 묵소."

키는 작지만 체구가 단단해 보이는 쪽, 거친 수염 덥수룩한 타마모 크로스의 트레이너가 털털하게 웃으며 타마모와는 억양이 다른 한 마디를 얹자 오구리의 빰이 살짝 발그레하게 물들고, 크릭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그런 오구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는 꼬옥 껴안은 다음 후후 웃으며 말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크릭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마자 히야악, 라이스 샤워인듯한 가녀린 비명소리가 들리다 부드러운 무언가에 얼굴을 파묻힌 듯 으븝 소리와 함께 뚝 끊겼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문디야 누가 준다캤나, 벨 핫바지 방구 새는 소리를 지끼고 자빠짓어. 오늘 찬 좋은데 가가 밥이나 쳐 무라. 먼 일로 이까지 왔노."

타마모의 물음에 웃고 있던 두 트레이너의 얼굴이 가볍게 굳었는데, 아따 칠칠맞구로, 하면서 오구리의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엄지로 닦아 쭙 빨던 타마모는 그런 것을 볼 겨를이 없었다.

"우리 둘 당분간 자리를 비워야 돼서. 한 사흘쯤 후면 돌아올거야. 둘이 알아서 하리라 믿지만 혹시나 해서 참고용으로 트레이닝 메뉴 가져왔어."
"크릭 이 가시내는 어데 갔노? 아나 오구리 니가 하나 더 무라. 근디 둘이 같이 가나? 뚱뚱이와 홀쭉이 둘이서 어데 가는데? 요요요 수상쩍은 냄시가 나는디."
"음…두 사람…우마뾰이했다이가……."

타마모가 짓궂은 표정으로 운을 띄우고 여전히 입 안에 초코바나나 가득한 오구리가 친구 말투 따라 저급한 농담을 건네니 오구리의 트레이너는 그저 하하 웃고 타마모의 트레이너도 피식 웃으며 커피를 들이키다 사레가 걸려 콜록거릴 즈음,

바아아아앙!!!!

트레센 학원 학생들로서는 퍽 오랜만에-신입생들은 처음으로-듣는 슈퍼카 엔진소리가 카페테리아를 가득 메웠다. 창 밖을 내다 보니 아직도 새빨간 자태를 눈부시게 자랑하는 슈퍼카 한 대가 미친 듯이 질주하며 교직원 주차장으로 들어오더니, 신명나게 아스팔트와 타이어 수명 함께 갉아먹는 까가가가각 소리 내며 팽이마냥 핑그르르 돌다 비어있는 칸에 정확히 빨려들어가지 않는가.

이 세상 것 아닌 듯한 기예에 익숙한 상급생들은 언니 여전하시다며 피식 웃고, 그 광경 처음 본 신입생들은 얼이 빠져 오오ㅡ 하는 탄성과 함께 박수치던 와중 으르릉 사납게 공기 울리던 엔진이 푸르륵 꺼지고, 운전석 열리며 왕언니 튀어나오리란 예상과는 다르게 조수석이 먼저 열리며 퍽 오랜만에 얼굴 보이는 마르젠의 담당 트레이너가 기어나오듯 차에서 내려 잠시 휘청휘청, 고개를 휘휘 저으며 두 발이 땅에 붙어있음을 감사라도 하듯 양팔 낮게 벌리고 하늘 향해 가슴 펼쳐 보이는 모양새가 마침내 쇼섕크를 탈출해 자유를 찾은 은행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마르젠스키. '괴물' 마르젠스키. 트레센 학원에서는 여러 이유를 들어 그를 가히 살아있는 전설이라 칭할 만 하였는데 그 첫 번째가 거리구질 상관없이 출전하는 레이스마다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온갖 트로피와 상금을 훌훌 빨아들였기 때문이요, 두 번째는 말 그대로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중에 크리스마스 직후 저기서 심호흡하는 사내ㅡ자신의 담당 트레이너를 냅다 잡아먹어 트레이너에서 남편으로 변신시키고는 아리마 기념에서 압도적 대차로 우승하자마자 갑작스레 결혼발표와 은퇴와 졸업을 동시에 선언해(이 학원에 졸업이란 제도가 있었냐며 항의하던 에어 그루브가 이사장 비서에게 붙들려 끌려간 것은 둘째 치고) 아키카와 야요이 이사장과 심볼리 루돌프 회장 그리고 여러 관계자들의 위장 건강과 정서적 안정에 꽤나 심대한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라. 아키카와 이사장은 아직도 겨울에 징글벨 소리만 들리면 왈칵 눈물부터 터뜨리며 비서인 타즈나부터 찾는다던가. 그 어린 나이에 참으로 안 된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누구에게 패해서 굴욕적으로 물러난 것도 아니요, 저 까마득한 위에서 더욱 위를 바라볼 수 있음에도 그에 만족하고 욕심 없이 내려와 훌쩍 떠났으니 전설은 그대로 전설로서 남았다.

레이스이든 가족계획이든 마르젠스키 그의 행적은 (관계자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뭇 트레센 우마무스메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니 이렇듯 황금보다 가치있는 온갖 조언 해줄 만한 대선배가 트레센에 다시 찾아온 것은 반가울 만도 한데, 선 굵은 남정네 손에 마르젠의 애차 문이 열리고 윤기나는 갈색 머리 보이자마자 그를 보아서 알던 사람들은 으아악 비명을 지르고 그를 들어서 알던 신입생들은 꺄아악 소리를 지르니 온 학교 소녀심에서 우러나온 경악으로 쩌렁쩌렁 진동하는 와중 약지에 사파이어 박힌 백금 반지 반짝 빛나는 손으로 남편의 손을 잡고 조신하게 차에서 내리는 마르젠스키의 배가 멀리서 보아도 눈에 띄게 두둥실 부풀어 있음이 그 이유임은 명백하였다.

그와 동시에 교내에 설치된 모든 스피커에서,

[아ㅡ 부회장 에어 그루브다. 심볼리 루돌프 학생회장으로부터 전언을 대리로 전한다. 20분 뒤 대강당에서 외부 특별 초청 강사 마르젠스키의 '졸업생과의 만남' 강의가ㅡ 회장님!! 혼자 가지 마시라니까요! 소파는 왜 들고 가시는 겁니까! 브라이언! 학생들 통제해야 될 것 아니냐!! 네 언니가 어디 있는지는 내가 어떻게 아나! 야! 야아!!!! 헉, 마이크 아직 켜져 있…….]

하고 덜커덕 뚝 끊기는 소리와 함께 지지직 잡음 들리다 쥐 죽은 듯 잠잠해지니, 딱 3초 정도 정적 흐르다 누군가 침 꼴깍 삼키는 소리 들리는 순간 카페테리아 문을 박살내다시피 열고 절박하게 달려나가는 시킹 더 펄과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콜트 리볼버 들고 그 옆에서 살기등등 몸싸움하며 달려가는 타이키 셔틀을 필두로 트레센 학원의 대강당으로 향하는 모든 통로는 내진설계 하중의 한계치를 버텨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방긋방긋 천진난만한 하루 우라라를 들쳐업고 달려나간 킹 헤일로 다음으로 가장 늦게 빠져나간 것은 넷이었는데, 울상이 되어 초콜릿 분수와 문을 번갈아 바라보며 안절부절 못하던 메지로 맥퀸과, 당근 햄버그를 입에 가득 문 채 영문도 모르고 사일런스 스즈카 그리고 그래스 원더에게 양팔 붙잡혀 끌려간 스페셜 위크였다.)

"아따야……."

순식간에 텅 빈 카페테리아에 오구리와 단 둘이 남게 된 타마모 크로스가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여기가 학교인지 뾰이촌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 하며 한숨 가볍게 내쉬고는 탄산음료 한 모금 꼴깍 삼킨 타마모였으나 가만 보니 있어야 할 꺼꾸리와 장다리 두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근디 이노마들은 어데갔노."
"둘 다 방금 전에 창문으로 나갔어."
"어데!?"

오구리가 엄지를 들어 가리킨 뒤쪽, 활짝 열려 바람에 흔들거리는 창문 너머로 타마모 트레이너의 흙투성이 지프가 먼지구름 피워올리며 학원 후문을 향해 멀어지고 있었다. 원활한 도주를 위해 창문 바로 밑에 차를 잠시 주차시켜 두었다가 방송 나오는 것을 듣고는 우마무스메들 여럿이 뛰쳐나가 혼란스러워진 와중에 다급한 탈출을 감행했으리라.

"이야……시상천지 빙시들 빼까린디 우리 옆에도 둘 있읐네. 누가 잡아묵는다캤나, 저러다 다리몽댕이 뿌러지면 지들만 고생이제."

창틀에 기대 초코바나나를 다 먹고 남겨진 꼬치를 담배라도 되는 양 입에 물고 오물거리며 멀어지는 지프를 구경하던 타마모가 때마침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푸 소리를 내었다.

"쫓아갈거야?"
"아이고, 이 써글노무 딸래미야. 시커먼 머스마들 쪼까가서 잡으면 만다꼬 쪼까가노. 사흘 있다가 온다캤으이 그 때 보믄 되제. 저노마들 수첩 뒤져서 우리끼리 또레닝이나 하고 있으마 된다."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허리를 수그려 바닥에 떨어진 꼬치를 줍던 타마모가 오구리의 순진한 물음에 역정내듯 대답했다.

"강당에는?"
"안 갈란다. 니는?"
"나는 어디든지 타마랑 있는 게 좋아."
"에비야, 그 말 남들 앞선 함부로 하지 마라이. 아나 가자."

시무룩해진 오구리를 뒤로 하고 손을 탁탁 털며 카페테리아를 나가는 타마모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누가 티라고 연락이라도 줬나?'

그 의문은 정확히 들어맞아, 학원에서 멀어지는 지프 안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트레이너 두 명의 핸드폰에는 과거 자신들의 대선배 트레이너, 현 마르젠스키의 남편이 아내 눈 피해 긴급히 작성해 보낸듯한 짤막한 메시지가 떠 있었다.

[학원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칠 것. 신입 남성 트레이너 우선.]

"저기 선배님……타 있으라고 하셔서 일단은 앉아 있는데, 저희들 어디 가나요? 개인 물품은 다 기숙사에 있는데."
"음, 학원에서 며칠 떨어져 있을 참입니다. 가면서 설명드릴게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은 연락 돌렸는데, 그렇게 비상상황인가요? 우마무스메들도 데리고 가야 하지 않을지……."

주뼛대는 신입의 물음에 타마모 트레이너가 제 수염만치 텁수룩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무서운 소리를 암찮게 하는 재주가 있소. 도착하면 그 누구야, 회장네 트레이너한텐 그런 소리 말어야. 크~은일난다잉. 암튼 쉬게 된 김에 뜨신 물에도 몸 푹 담그고 바-비큐도 함 찐~하게 조지봐야.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쉬겄어어."
"저희 이거 무단이탈 아닌가요? 트레센 첫 해부터 징계 받기는 좀 그런데."
"이사장도 이해해줄것이여. 아님 갸도 한창때 꼬맹이라 같이 껴서 와와꺄꺄 하고 있을지 어쩔지는 모르겄는디, 어쨌건 우리는 할만큼 해브렀어. 못 나온 놈들은 머……뒈지지는 않겄지잉."

뒷좌석에 영문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신입 트레이너 둘을 태우고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액셀을 밟으며 지프는 달렸다. 곧 트레센을 뒤로 한 다른 차량들, 아마 사정 비슷하게 피난 나온 트레이너들의 자가용이 하나둘 합류하며 타마모 트레이너의 지프를 선두로 삼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할 수 있는 피난길에 나섰다.


◈ ◈ ◈ ◈ ◈


"다들 안녕~ 오랜만에 보는 얼굴도 처음 보는 얼굴도 있네. 방가방가~ 마르젠스키란다~"

정말 내가 알던 마르젠스키 선배가 맞구나. 에어 그루브는 대강당 앞 연단에 서서 옛날 고릿적 유행어를 아직도 읊고 있는 마르젠을 보며 씁쓸하게 웃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분명 시작은 20분 후라 했건만 평소에는 불러도 제 시간에 전부 오는 일이 드물던 녀석들이 3분만에 대강당을 꽉 채운 것도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인데 그 와중에 싸움이 벌어지거나 다치는 사람 하나 없이 일사불란하게 처처처척 들어와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 그저 경악스러웠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마르젠스키의 연애담-그리고 비유적으로든 말 그대로든 트레이너를 다리 사이에 가두는 방법-을 듣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찬 학생들은 서로 몸싸움을 하다 다쳐서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천금보다 귀한 정보를 놓치느니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서 질서를 지키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본 것이며 이 모든 과정이 대화나 몸짓 하나 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이 놀라울 뿐.

'평소에도 이 절반만 해 줬다면…….'

소식이 늦어 양호실에서 목발을 짚고 쩔뚝이며 도착한 학생을 마지막으로, 바깥에서 교통정리를 맡아준 히시 아마존과 후지 키세키가 문을 닫고 들어와 에어 그루브에게 눈 인사를 하고 심볼리 루돌프 회장의 빈 자리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 회장으로 말하자면, 며칠 전 마르젠스키의 전화를 받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몇 날을 설레하며 안절부절 못하다가 빨간 슈퍼카가 교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자마자 방송을 할 생각은 않고 냅다 튀어나가 대강당에 1착하여 맨 첫째 줄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학생회 인원들과 기숙사 사감들의 자리를 맡아놓을 정신머리는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 해야 하나 싶지만, 지금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뜨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영 미덥지가 못하여 미간에 절로 내 천(川)자가 새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들 모였나 보네! 그러면 참석한 친구들에게 언니가 선물 하나씩 나눠줄테니 파우치 받아서 뒤로 넘기렴~ 우리 아가 부탁~해요~"

푹신한 소파(익숙하게 생긴 것을 보니, 심볼리 루돌프가 아까 전 학생회실에서 번쩍 들고 튀어나간 소파가 분명했다)에 걸터앉은 마르젠스키가 가발 좋아하는 늙은 탤런트를 따라하며 느끼한 목소리로 말꼬리를 끌자 그 '우리 아가', 즉 마르젠스키의 남편이 일어나 두 팔을 걷고 커다란 박스 하나를 들고 나오니 195cm에 달하는 근육질 남정네를 서슴없이 아가라고 불러대는 그 행태에 경악한 좌중이 꺄아악 하고 질투와 부러움 섞인 야유를 내뱉었다.

"다 받았니? 파우치는 이따가 이야기 끝내고 열자! 아가도 수고했어, 움~뫄!"

빈 박스를 접어 옆으로 치워놓은 연하 남편을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던 마르젠스키가 일어나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채 뺨에 요란한 키스를 퍼붓자 꺅꺅 하는 비명소리는 더욱 커지는 와중 벌써부터 야릇한 얼굴로 온몸 비비꼬며 끙끙거리는 우마무스메들도 몇몇 있었다. 그리고서 입술을 뗀 마르젠스키가 단호하고 확고한, 그러나 신명나는 표정으로 한 마디,

"자! '졸업생과의 만남' 행사지만 뻔드르르한 건 이름 뿐이고! 다들 뭘 원하는지 알지! 언니는 서론잡담본론결론 없이! 딱 본론만 얘기할테니 잘 들으렴!"

시끌시끌하던 대강당이 일순 조용해지며 개미가 지나가도 그 발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에어 그루브도 절로 마른침 꿀꺽 삼키는 와중 스크린에 마르젠스키가 준비한 시청각 자료가 하나하나 떠올랐다. 오랜 옛날의 것인지 누렇게 변색되고 여기저기 삭은 종이, 그리고 무덤인 듯 보이는 작은 언덕 두 개.

연애담 들을 생각으로 왔건만 역사 강의가 시작되려나, 다들 어리둥절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와중 마르젠스키가 입을 열었다.

"이건 후한 시대의 연애편지란다. 특이하게도 귀족 집안의 우마무스메 능운련凌雲蓮과 당시에는 드물게 글을 익힌 평민 숯장이 오 씨가 주고받던 물건인데……."

감수성 가녀린 우마무스메들은 듣다가 눈물지으며 손수건을 찾는 연애사가 이어지다, 그 오 씨가 전쟁터에 끌려가게 되었다. 어느 시대의 전쟁이 안 그랬겠냐마는 이 시대에 전쟁에 나가게 되면 연락도 닿지 못하는 곳에서 죽거나 살거나 살아도 반뿅뿅 되기 마련인지라 능운련은 눈물 흘리며 편지라도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절절한 글 두어 장 써서 보냈는데, 쓰면서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처음에는 그리움과 걱정을 이야기하던 글들 사이사이 점차 섬섬纖纖, 애애哀哀, 화화和和, 랑랑琅琅 등 발음내는 대로 야릇하게 들리는 단어들이 섞이면서 목소리 아름다운 이가 곡조 붙여 부르면 뭇 사내들 마음 충분히 홀릴듯한 음가淫歌가 되어가는 와중 '내 침상 비워두고 달빛 아래 창문 열어 별바람만 걸친 채 그대 기다리리'하는 마지막 구절로 화룡점정을 맺었다. 오락거리 퍽 부족한 옛날이었으므로 전쟁터에서 글 읽을 줄 아는 사내들이라면 속된말로 거시기 달아올라 터질 만한 글이었을 테다.

게다가 마르젠스키가 예쁘기로는 정평이 난 그 목소리로 찬찬히 따라 읽으며 발음을 살짝살짝 흘리거나 숨소리 은근슬쩍 섞으니 대강당에 있던 우마무스메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얼굴 새빨개지며 딴청을 하거나 억지로 웃으려 하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거침없는 아줌마들 음담패설 듣는 자리에 끌려와 민망해하는 여고생들 아닌가.(실지로 그러하였다.)

마르젠스키의 눈이 가늘어지며 싱긋 웃고는 남편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편지는 어찌저찌 오 씨에게 전해졌습니다. 오 씨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다 하루를 혼절한 후 일어나 겨우 답장을 적었다고 하는데, 부족한 목소리나마 제가 대신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갑작스레 찬물이 끼얹어진 듯 정적 위에 정적이 더해졌다. 마르젠스키의 남편은 묵직하게 깔리는 중저음 목소리와 또박또박 명확한 발음 덕택에 트레이너 생활을 하기 전에 성우로서 꽤 이름을 날렸던 과거가 있는데,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의 대사만을 엮어서 가지고 다니며 듣는 우마무스메들도 몇 명 있다는 소문도 돌 정도였다.(대다수 괴소문의 경우처럼 사실이었다) 그런 그가, 남자 쪽의 답장을 읽어준다고? 저 음란한 연애편지의 답장을? 내용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기에 앞서 먼저 녹음기부터 켜는 학생도 있었으나, 그를 제지할 만한 학생회 임원들과 사감들은 모두 맨 앞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거나 손바람을 일으켜 얼굴을 식히거나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끝마칠 시간도 없이, 마르젠스키의 남편이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으흠,

련련,
글을 배웠으나 엮는 재주는 배운 바 없어 아름다운 말은 적지 못하지만,
련련,
그대 섬섬이 스치었을 글귀나마 흉내내어 적어 보오.
련련,
그대에게 돌아가고픈 마음이 내 등을 떠밀어 달리게 한다면
그 때는 감히 어떤 질풍이 나를 앞지를까?
그 때는 감히 어떤 번개가 나를 이길 수 있을까?
항우 향해 강물 내달리던 오추미인마저도 나를 이길 수 없으니
약속컨대 내 그대에게 돌아간다면
영영永永히 함께 초원을 내달리며 바람을 들이마실테요
그대 나를 붙잡으시오
내 그러지 못하도록 달릴 수 있으니
허나 우리가 그리하더라도
정녕 어떤 바람도 우릴 뒤로 하지 못할 테요.


……라는 내용입니다."

야설이었다.

맨 앞줄에 앉은 후지 키세키와 히시 아마존은 듣다가 혼절하였고, 심볼리 루돌프는 벌써 몇 분째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허벅지를 꽉 그러쥐고 있었으며, 나리타 브라이언은 평소 쿨하던 태도는 온데간데 없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어 방금 막 씻은 토마토를 갖다 두어도 구분이 어려울 정도였다. 뱀부 메모리는 세로로 잡은 죽도에 제 머리를 쾅쾅 박고 있었으며, 사쿠라 바쿠신 오는 앞머리가 흘러내린 것도 눈치채지 못했고, 에어 그루브만이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있었다.

'당신을 위해 침상을 비워두고 맨몸으로 기다리겠다'며 도발적인 편지를 보낸 우마무스메에게, '내가 질풍이나 번개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으며 돌아가면 우리 달리기 경주를 하자, 내가 이기겠지만 우리 둘 다 바람보다 빠를 것이다'라는 메가톤급 카운터 펀치가 날아들었다. 이 오 씨라는 인간 남정네는 능운련과 함께 하며 우마무스메의 성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니 정녕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글은 적을 수 없을 터인데, 당장에 금서가 되어 불태워졌어야 할 글이 우마무스메의 생태 모르던 당대 사람들에게 애틋한 연애편지려니 여겨져 살아남은 끝에 오늘 여기 마르젠 남편의 목구멍에서 묵직한 저음으로 흘러나와 귀에 때려박혀버린 바, 이미 대강당의 우마무스메들은 이목구비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는 능운련의 얼굴 위에 제 얼굴을, 그 능운련을 앞질러 달려나가는 오 씨의 얼굴 위에 제 트레이너들의 얼굴을 덧씌운 상상의 나래를 펴고는 말을 잃고 아랫배를 붙잡은 채 온몸을 비비 꼬며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소리들과 함께 끙끙 앓고 있었다.

"자, 이제 파우치를 열어볼까?"

시작하기 전 나누어 받은 파우치. 마르젠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우마무스메들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파우치를 열었다.

파우치의 구성품은 간단했다. 소형 녹음기, 방금 마르젠의 남편이 읽은 오 씨의 편지가 인쇄된 손바닥만한 종잇장.

"트레이너에게 읽어달라고 하렴~ 그럼 우린 아듀☆"

마르젠의 강의가 끝나자 우레와도 같은 소리가 대강당을 메웠다. 그러나 평소 연단에 쏟아지는 박수 소리가 아니라 트레이너들을 찾아 대강당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우마무스메들의 발소리라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었으며, 트레센 학원은 다시금 내진설계에 대한 도전을 마주하게 되었다.

"가끔 보면 우마무스메들은 에로티시즘에 대한 역치가 정말 낮은 것 같아."
"그런데 힘은 또 세니 이런 사고 저런 사고 일어나지 뭐니~"

역치가 어쩌고 하였던 트레이너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마르젠스키를 쳐다보았다. 당장 마르젠의 뱃속에 잠든 채 엄마가 아빠에게 이 음식 저 음식 가져다달라, 다리를 주물러달라 등등을 요청하게 만드는 저 아기도 그 '사고'의 결과물 아닌가.

"무서운 얼굴로 보면 밤에 혼내줄꼬야."
"아…아기한테 안 좋지 않을까?"
"선생님이 이제 안정기래! 우리 붕붕이 오늘 아빠랑 좀 일찍 만나볼까~?"

혀짤배기 소리 내다 눈빛 야릇하게 변해 아기의 태명을 주워섬기는 마르젠스키에게 손목 붙잡혀 볼록 솟아오른 배에 손바닥 갖다대어진 트레이너의 얼굴은 시커먼 흙빛 되어 아내를 에스코트하며 퇴장하고, 텅 빈 대강당에는 정신줄을 겨우 붙잡고 뒷정리를 위해 남아있다가 방금 대화를 듣고 완전히 눈 까뒤집은 채 거품 물고 기절해버린 에어 그루브만이 남아있었다.


◈ ◈ ◈ ◈ ◈


트레센 학원 한 구석에 마련된 특별 병동엔 골반이나 허리가 박살난 트레이너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무사히 피난 갔다 우마무스메들이 정신 차릴때쯤 돌아온 트레이너들의 업무량은 두어 배로 늘었지만 오히려 목숨 건진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 내쉬고, 선배들에게 이끌려 목숨과 허리 부지한 트레이너들은 무한한 감사와 함께 다음에는 자신들이 신입을 챙기겠노라 하고 있었다.

"살긋다고 내빼더니 찐으로 살아왔네. 잘 쉬고 왔나?"
"죄 많은 목숨이 오늘도 살아브렀스~ 타마찌 자네는 트레이닝 잘 하고 있었능가?"
"누가 타마찌야!"

"어서 와라, 트레이너."
"음. 떳떳하게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다녀왔어 오구리."

야외 카페테리아의 한 쪽 구석에 마련된 테이블에 둘러앉은 오구리 캡, 타마모 크로스와 트레이너들은 앞에 주전부리와 마실 것들을 늘어놓은 채 운동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에 기브스를 두른 채 뚱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은 트레이너 하나, 그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휠체어를 미는 우마무스메 하나. 지금 트레센에서 그리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한 쌍이 트레이닝 코스를 향하고 있었다.

"저 지경이 돼도 훈련은 계속 하는구나. 트레이너들은 정말 대단해."
"책임감이고 자시고 목구녕이 포도청인기라. 여서 짤리면 허리빙시 골반빙시 돼서 어데 일할낀데."
"타마는 사회의 어두움을 많이 알아. 정말 대단하네. 어른 같아."
"에이 뭔……도나쓰나 무라. 아~"
"아~"
"거 한참 꽁냥대는 중에 미안한데 말여, 자네들 우리 없는 동안 밥은 제대로 된 거 묵었어? 어째 오구리나 니나 쫌 부해보여?"

절친한 동료의 말을 들은 오구리 캡의 트레이너는 미간을 찌푸린 채 타마모와 오구리의 배를 보았다. 과연, 오구리는 그렇다 쳐도 타마모마저 옆구리 쪽으로 허릿살이 살짝 삐져나와 있지 않은가. 평소대로라면 오랜만에 얼굴 보자마자 맞고 싶냐며 역정낼 타마모였겠으나,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 어딘가 뜨끔한 데가 있지 싶었다.

"식당이 문을 닫아가……우마이츠로 배달음식만 줄창 묵었으. 이…수영 조지모 금방 뺄 수 있을끼다!"
"아~따 타마찌가 돼찌가 돼브렀어야!"
"이 씨브럴 털재이 문디새끼가 진짜!"
"우거억!"

타마모 크로스의 손이 트레이너의 목을 조르고, 오구리의 트레이너가 쩔쩔매며 둘을 떼어놓으려는 동안 느긋하게 화이트 초콜릿을 마신 오구리 캡은 코 끝에 휘핑크림을 묻힌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초가을ㅡ하늘은 높아 맑은 바람에 실려 올라간 구름도 몇 점 없이 유유히 흘러가고, 수확철 맞아 각지에서 엄선되어 올라온 각양각색 식자재들이 다함께 윤기 뽐내며 지나가는 우마무스메들의 발걸음을 붙들어 놓거나 이에 그치지 않고 뱃속으로 빨려들어가선 어제의 자신을 원망하며 눈물과 함께 더트 코스를 뛰어다닐 만큼 말캉한 살집으로 화하는 계절. 윗입으로 음식을 먹었건 아랫입으로 사람을 먹었건 포식을 한 우마무스메의 배가 어떤 이유로든 부풀어 오르는 계절.

"음. 가을이네."

그야말로, 가을이었다.



끝.









사람이 말딸 앞에서 달리는 게 성적 도발이라는 괴문서가 참 좋다

마르젠스키에게 미안-안-미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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