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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프린.. | 21/07/30 21:32 | 추천 52 | 조회 3163

93년생을 돌봐준 성년후견인 고소진행하려 합니다 응원 부탁드립니다^^ +330 [25]

보배드림 원문링크 https://m.bobaedream.co.kr/board/bbs_view/best/445306

안녕하세요 보배님들 

무더운 여름과 코로나로부터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첼로프린스는 지난 10일 보배드림 회원 사회복지사님으로 부터 제보를 받고 해당 여성분( 93년생)님의 사연을 듣게되고 일주일여 동안 연락을 취하고 어린나이부터 임금 착취로 그리고 노동력 착취로 지금까지 고난의길을 걸으며 살아오셨기에 아무도 믿지를 못하고 또 이사람에게 당하는건 아닌가 의심이 많은 상태여서 제 회사 명함과 연락처 그리고 현재 제 회사 여성 직원분들의 도움으로 경계심이 풀리고 저와 긴 통화를 하였고 전 또다시 너무 속상하고 분노를 금할길이 없을만큼 펑펑 울게 되었습니다

 

지난 15년간 성년후견인을 잘못만나 15년간 단 하루도 먹고싶은거 입고싶은옷 화장 등등 아무것도 못하고 단한마디 정말 못된 할머니에게 1년에 단 한번이라도 들으면 그져 위로라 생각하는 분이었습니다 

 

보배님들 긴글 진심으로 정독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또한 지금까지 대학까지 는 공부를 했다고 생각하셔서 올리는글 문제없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약간의 읽기 어려운부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하루 20시간씩 오로지 그 할망구를 위해 

노동력을 착취 당했기에 29살이라는 나이임에도 손가락은 정말 제가 확인한결과 70대 어릴적 만져보던 할머니 손처럼 쫙쫙 갈라진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믿을수 없는 상황이며 강력한 할망구 처벌을 받울수 있도록 첼로프린스는 법적인 노력 강구할것입니다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진구 양정에서 쭉 살았고 위탁가정에서 15년간 아동학대 당한 93년생 여자입니다. 


저의 친가는 세탁소 운영하고 저의 외가는 성당 다니며 유복한 집안이라고 합니다. 

친어머니는 막내딸이고 오빠가 둘이 있는데 의사 검사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집안에서 어머니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임신해서 나타났다고 외가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친정 도움없이 저를 낳고 가정을 꾸렸으나 친아버지가 술만 마셨다 하면 받은 월급 아무나 퍼주고 빈손으로 왔다고 합니다. 

시댁에 반찬 얻어다 살림하다가 생활고 때문에 대여섯살인 저를 데리고 어머니는 집을 나왔습니다. 법적으로 이혼 했는지는 모릅니다. 


하루종일 걸어다니다 김밥천국에서 김밥 한줄 나눠먹고 해지면 여기저기 하룻밤씩 잠을 청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는 아마도 사실혼 관계로 동거 및 동업을 하시고 새아버지, 새언니, 친어머니, 나 4명이 한집에 살면서 여인숙을 차렸습니다. 


새아버지 성은 박씨고 이름과 나이는 모릅니다. 새언니 이름이 박시영 91년생 양띠로 기억합니다. 

제 성이 바뀌지 않고 김씨였던 것 보아 법적인 재혼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새아버지가 친어머니를 자주 때렸고 집안에 비명소리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멍든 눈을 가리려 선글라스 쓰고 계란으로 멍든 팔다리를 문지르던 기억이 납니다. 폭행 이유는 성관계 거부라고 합니다. 


여인숙 청소해주시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도보 5분 거리에 거주하시고 저희집 사정을 아셨습니다. 훗날 저의 위탁가정 보호자 되시고 (틀린 정보가 있었지만) 저의 가정사를 알려주신 분입니다. 


걸핏하면 두들겨 맞던 어머니가 피신하고 잠적하자, 새아버지는 저를 초량 친척집에 볼모로 보내고 엄마가 어디 숨었는지 말하라고 골프채 휘두르며 때리고 평소에 자다가 가위 같은 주방도구가 날아오는 봉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어둑한 밤에 저를 생매장한다고 차 트렁크에 삽을 싣고 저를 태우고 산에 가려는 새아버지를 할머니가 회유한 덕분에 무사히 넘겼습니다. 

이날 이후 할머니를 제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집안에 갓난아기가 생겼습니다. 성별도 모르고 이름도 모릅니다. 친어머니는 배가 불러있던 적이 없는데 누구의 아이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저에게 작은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나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 아기가 죽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조사를 받는데 제가 증인이었고 잘 모른다고 하자 새아버지가 귀뜸으로 니엄마가 한 거 맞다고 해라 니엄마는 여기서 못나온다 집에 가면 내가 너 죽일거다 이런 말로 주먹쥐어 보였습니다. 저 너머 엄마를 슬쩍 봤는데 저를 바라보는 차분한 눈빛이 무슨 sign인지 모르겠고 당시 제 상상력인지 헷갈리는데 문 틈으로 빼꼼 봤을 때 엄마가 주방에서 냉장고 손잡이를 잡고 밟는 실루엣을 본 것 같다고 진술했습니다. 


아직도 누구의 아이인지 왜 죽었다는 건지 친어머니가 살인자가 맞는지 궁금합니다. (이 사연은 저의 오랜 비밀이자 의문인데 나중에 폭로전이 생길까 봐 숨김없이 미리 알려드립니다.) 


결국 어머니와 새아버지는 갈라서고 어머니는 감옥에 간건지 어쩐지 몇달간 홀연히 사라졌고 새아버지는 새언니만 데리고 떠났습니다. 


IMF 경영난과 여인숙 특성상 형편이 어려워 입실료 못내고 눌러사는 손님들이 많아 폐업 했습니다. 이때 할머니 임금을 밀렸다고 합니다. 제가 어른이 되면 반드시 몇배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99년도 최저시급 1500원 시절에 매일 종일 일해주신 거 아닌데 할머니 월급이 120만원이라고 합니다.) 


물건마다 빨간 딱지가 붙고 빚 독촉하는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빚 독촉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여인숙에 저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었더니 할머니가 찾아와 주방 문 따고 밥차려 주셨습니다. 


굶던 제가 허겁지겁 맨밥 삼키며 여인숙을 나서는 할머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답니다. 


새벽에 보따리 싸서 밥솥 끌어안고 할머니 댁으로 도망왔는데 할머니도 단칸방 세들어 사셨고 형편이 여의치 않아 저를 책임질 수 없다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재회한 어머니를 통해 봄 방학 즈음, 외가에 저를 맡겼더니 미국으로 해외입양 보낸다고 미용실에 데려가 제 긴머리를 귀밑 단발로 잘랐습니다. 


아주 어릴때나 해외입양 가능한데 늦었으니 서둘러 보낸다고 통보하자 할머니가 만류하시고 차라리 내가 키우겠다 나한테 보내다오 하셔서 할머니 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버림 받은 것도 서러운 가엾은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느니 당분간 보살피겠다고 어머니가 안정적인 일자리와 저를 키울만한 전세집을 구하거든 돌려주겠다 약속하셨는데 할머니가 제시하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저는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친어머니와 간간이 연락 닿았을 때는 할머니의 폭력 행사가 없었기에 할머니가 저를 싫어하는지 몰랐는데 저를 많이 싫어하셨다고 합니다. 시영이 언니는 인사 잘하고 착했는데 저는 어리광 부려서 부부싸움 조장하는 악의 근원이었다고 합니다. 


할머니께서 여인숙 시절 일곱살인 저를 세수시켜 주신 적 한번 있는데 눈코에 비눗물 다 들어가고 귀구멍까지 씻어야 된다고 손가락으로 쑤시고 목에 때봐라 하면서 찌르듯이 문지르고 손길이 억세고 엄청 아팠습니다. 저는 아프다고 울었는데 제가 할머니 손 닿는 게 더럽다고 울었다며 싹수가 노랬다고 합니다. 


여인숙이 2층이어서 통로형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할머니가 평소에 무릎이 아프다 하셨습니다. 어느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는 모습을 뒤에서 봤고 할머니 무릎 아프다면서 어떡하냐고 했는데 아프다더니 잘~ 내려가네 라고 제가 비꼬았다고 합니다. 


빨래하느라 힘들다고 자주 그러셔서 세탁기 돌리는데 힘이 드냐고 순수한 의도로 물은 적이 있습니다. 세탁기가 빨래하는데 하는 게 뭐 있다고 힘들다 하냐고 제가 싸가지 없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5,60대의 젊은 할머니셨고 패티김 스타일의 화려한 패션 좋아하시고 멋쟁이 소리 많이 들으십니다. 


거의 매일 사교댄스 다니셨는데 쿠폰처럼 생긴 입장권을 내고 할아버지 할머니들 모여서 차차차 브루스 추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동네에 따라서 물이 좋고 안좋고 하시며 입장권 가격은 500원~1200원이라고 합니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빤스 차림의 할아버지(백조아파트 사셔서 백조아저씨라고 부름)랑 할머니가 화투치고 계셨는데 저와 살기 전에는 이렇게 춤추다 알게 된 할아버지 모셔와서 화투치며 용돈 받으셨다고 이제 저 보기 민망하다고 못오게 하셨습니다. 


오후에 할머니가 외출 준비를 하시면 저는 티비 못보게 하고 할머니가 꾸미느라 어지른 것 청소시키셨습니다. 청소 다 하면 마당에 나와 (방에 있으면 도로 먼지 생기니까) 담벼락 내다보며 밤 10시 11시까지 우두커니 서서 할머니 기다렸습니다. 


할머니가 예의범절을 엄하게 가르치셨는데 아무데나 철퍼덕 앉는 거 싫어하시고 크게 혼내셔서 담벼락에 얼굴만 내밀고 반나절 동안 서서 다리 아픈 줄 모르고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면 약주 한잔 하신 할머니가 강아지 배고프지 엉덩이 두들겨 주신 적이 드물게 있었는데 그게 너무 기뻐서 배고픈지도 모르고 기다렸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키운다는 명목으로 경제활동 일체 안하셨고 구두방 할아버지와 옷수선 할아버지에게 잦은 외상과 돈을 꾸어 생활하셨습니다. 


급식비를 못내자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 사정을 들으시고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해주셨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저를 SBS모닝와이드에 불우이웃 소년소녀가장 소재로 제보하여 할머니가 부재중일 때 가정방문 촬영했고, 아침에 교내방송으로 방영해주어 저의 가정사가 전교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말로는 담임선생님이 출연료로 골드바를 받았다고 이불 한채 들고 찾아와 인사하더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절에 다니시지만 교회에서 한달에 한번 쌀 10kg 지원해준다고 해서 저를 교회에 보내셨습니다. 저는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집에서 쓸 식수 떠오고 점심을 얻어다 싸와야 했습니다. 제 또래 친구들 보는 앞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부끄러워 교우관계가 서먹했습니다. 


할머니는 성공이 복수라고 악심 품고 독해지라며 개천에서 용났다 미꾸라지 용됐다 소리 들으라고 제 부모에 대해 적나라한 욕설과 비하로 증오심을 심어주셨습니다. 


저는 할머니의 모진 표현과 달리 사실 뭐가 뭔지 잘 몰랐으나 할머니에게 맞장구 쳐주려고 제 인생에 아버지 어머니라는 단어를 지우고 굳이 입에 담게 된다면 그남자 그여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빈 손으로 찾아와 좁은 방안에 요지부동 앉아있다 없는 살림에 한끼 얻어먹고 일어서는 어머니를 보면 할머니 눈치가 보였고 할머니가 평소에 돈이나 주고 가지, 밥만 축낸다 하던 말을 따라했습니다. 


친어머니는 애가 할 소리냐고 질색하며 발길을 끊었습니다. 저 역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 한바탕 쏘아붙이고 의절했습니다. 그해 가을운동회 때 잠깐 만난게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저를 데려가겠다고 할머니와 실랑이 벌이다 아버지가 고모뵈러 가자며 밀양에 묵고 오기로 했습니다. 


밀양 고모네 도착했더니 저에게 밤맛나는 (맛없었음) 푸딩을 먹으라고 쥐어주고서 한켠에서 할머니가 돈때문에 저를 키우는거라고 구분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소리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대문에 진돗개를 피해 부산 방향으로 도로변을 걷다가 주유소에서 전화 한통 빌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결심이 섰습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겠다고. 


아버지가 몇번 더 찾아왔는데 문전박대 당했고 어떨 땐 술취해서 횡설수설 하는 모습에 할머니가 스트레스 받으시니 눈치보여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의절했습니다. 


할머니는 고아원을 소년원과 비슷한 곳처럼 표현했습니다. 고아원에 가지 않으려면 할머니에게 쓸모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은행 심부름, 담배 심부름, 커피 타드리기, 화분에 물주기, 마당 이끼 청소, 밥하기, 설거지, 할머니 속옷 빨래도 했습니다. 할머니가 가사일을 가르치기도 하셨고 저도 당연히 내 일이라고 생각해 자처했습니다. 


할머니가 차츰 폭력적으로 변하셨습니다. 저를 키우는 걸 굉장히 억울해 하셨습니다. 친가도 외가도 부모도 버린 너를 왜 남인 내가 키우냐고 할머니 자식들 장성하겠다 황혼 보내고 싶은데 내 자식의 진짜 손주도 태어나기 전인데 벌써 할머니로 불리는 게 기분 나쁘다고 하셨습니다. 


이따금 너 버린 부모가 보고 싶냐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데 할머니를 남이라고 생각하냐고, 머리검은 짐승은 키우는게 아니랬는데 그까짓 지원금이 네 돈이라고 생각하냐고, 내가 너 살려줬는데 크면 할머니 배신하고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내 보따리 내놔라 할거냐고 넌지시 묻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저를 시험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부모가 그립지 않으며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낫대요, 할머니를 남이라고 생각안하고 할머니랑 평생 살거고 그 돈으로 생활하기도 빠듯한데 내 돈이라는 생각 추호도 안한다고 얼른 커서 은혜 갚겠다고 우러나서 대답했습니다. 


할머니가 여인숙 청소해주던 시절, 폭력의 원인이 어머니가 맞을 짓해서 맞는거라고 새아버지를 두둔했었는데 저는 엄마닮아서 떡잎부터 알아봤다며 쌓였던 불만을 점점 표출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낳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해서 젊은 나이에도 아파서 힘든 일을 못한다고 했었는데 할머니는 그걸 엄살이라고 생각해 못미더워하셨습니다. 


엄마 닮은 외모도 꼴보기 싫은데 몸사리면 얄밉다고 손목 비틀어지게 물기 짜라고 청소하느라 엎드린 저를 걷어차고 손에 잡힌 아무거나로 제 등과 목덜미를 내리찍곤 하셨습니다. 


묵묵히 가사일을 하다보니 제 몫이 늘어나고 강도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걸레를 뽀송뽀송 얼굴 닦아도 되게 사력을 다해 깨끗이 빨라고 걸레를 채찍처럼 휘둘러 제 얼굴을 때렸습니다. 한두번이 아닙니다. 


매일 대청소하고 매시간 걸레 빨고 물기 짜느라 온 힘으로 힘껏 짜고 손에 물 마를 날 없게 일하기를 10년이 넘었더니 손목이 시큰시큰하고 무거운 물건 들다가 손목에 낚시줄 끊어지는 통증을 느끼기도 하고 팔목이 헐거운 느낌이 들어 힘을 못쓰게 되었습니다. 


제 눈빛이 소름끼친다고 쳐다보지말라고 때려서 할머니 눈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어 시선 처리하기 어려웠습니다. 발걸음도 숨죽이며 걷고 할머니가 손뻗으면 저를 때릴까봐 움찔거리며 긴장 상태였고 누가 보면 내가 너 때리는 줄 안다고 어깨 내리라고 때리고 지금도 어디선가 부르는 외침이나 격앙된 소리가 들리면 흠칫 놀라고 심장이 철렁합니다. 


할머니가 밥을 차리면 내가 네 노예냐고 때리셔서 제가 전부 하려고 하면 밥 예쁘게 못 푼다고 제 손길 더럽다고 밀치고 흥부놀부처럼 밥풀 붙은 주걱으로 뺨때리고 두더지잡기 게임하듯이 쇠국자로 요리조리 머리 때리고 밥먹던 숟가락으로 이마 때리고 젓가락으로 눈과 귀를 찔렀습니다. 


저를 때리는 이유가 제가 울어서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맞기 전엔 안울고 있었는데 때리니까 아파서 운건데 울어서 때린다고 울음 그칠때까지 버르장머리 고친다고 응석 안받아준다고 때리셨습니다. 


아무리 맞아도 밥은 꾸역꾸역 먹어야 했고 머슴밥으로 퍼주시는데 냉큼 안먹으면 반찬 투정으로 간주해 또 두들겨 맞았습니다. 깍두기나 오이무침 등 아삭아삭 씹는 소리 징그럽다고 때려서 세탁기 앞에 서서 개밥처럼 훌훌 말아 마시는 게 편했습니다. 


발가벗겨 골목 구석에 몰아세워 나무빨래판이 두동강 날때까지 옴짝달싹 못하게 맞은 적도 있고, 지금은 자연히 고쳐졌는데 어릴 때 손톱 물어뜯는 버릇이 있어 치아 손톱 발톱 다 뽑아버리겠다고 펜치들고 달려들어 저를 때려 눕히기도 하셨고, 망치 고무장갑 고무호스 효자손 파리채 먼지털이개 빗자루 옷걸이 의자 각목 시멘트 벽돌 재떨이 압력밥솥 쟁반 거울 빗 칼 가위로 맞았고, 할머니가 씨름 스모 UFC WWE 애청자라 기술 모방해서 때리셨습니다. 


진열장 맨 아래 서랍이 공구함이었는데 쇠망치로 맞으면 아픈 것도 아픈거지만 머리가 띵 울립니다. 피가 찔끔 나긴 했지만 죽으라고 때리는 거 아니면 사람 머리가 쉽게 안깨진다는 걸 알았습니다. 뉴스에 나오는 둔기로 머리 맞아 죽은 사람은 죽어라 때린 겁니다. 


딸꾹질이나 재채기만 해도 노발대발 하시고 물건 집어던지고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 들을세라 흐느끼는 소리나면 더 때린다고 혼내셨고 할머니는 소리지르느라 목이 쉬고 저는 맞고 우느라 탈진하고 일주일 내내 맞은 적도 있습니다. 


때리고 나면 미운 놈은 떡하나 더준다고 맞은 사람을 발뻗고 자는데 때린 사람은 편히 못잔다고 호랑이가 제 새끼 안물어 죽인다고 가끔 자기 전에 안티푸라민 발라주고 토닥토닥 해주셔서 사랑의 회초리인 줄 알았습니다. 


할머니는 48년생으로 전쟁통에 고아 된 해방둥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안의 고아원 출신으로 40년생 죽은 고아의 호적을 빌려 다른 사람 이름으로 살고 계십니다. 


대구에 입양되어 포항으로 시집가셨는데 고아라고 구박받고 시집살이로 고생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산후조리 할 때 미역국 끓여주는 사람이 없어서 국수 삶은 물 면수 마시고 그랬다고 합니다. 이말 듣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에 대한 연민이 컸습니다. 


남편과 사별하시고 (술독에 빠져죽었다 하셨어요.) 과부가 되셨는데 선산에 묘자리 하나 못 물려받고 소박 맞아 부산으로 왔다고 합니다. 할머니 또한 기구한 사연이 있기에 사랑하는 방식이 서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저로 하여금 스트레스 해소하고 훈육이 아니라 마치 승부로 생각하며 엽기적으로 때리고 맷집 좋아진 제가 참고 견디자 급소나 명치 살없는 손등 발등 속살 골라때리고 일제강점기 고문이 이런걸까 느꼈지만 누구에게도 내색할 수 없었습니다. 


믿을 사람도 의지할 사람도 없고 내 편이 없다는 걸 깊이 체감하고 있었고 체벌이 당연했던 마지막 세대라서 경찰에 신고해도 대수롭지않게 다독여 중재해주기만 할 것 같고, 그렇다면 그 뒷감당은 오롯이 제가 감수해야한다는 보장받지 못하는 안전과 막연한 불신이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살면서 한번도 보호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게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제 신변이 위험해도 생판 모르는 남한테 부탁할지언정 할머니 귀에 들어가는 걸 극도로 꺼려했습니다. 할머니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씻겨주는데 네가 감히 불만 있느냐고 평소에 다그치고 을러대서 할머니로 인한 슬프고 힘든 점은 의사표현 할 수 없어 혼자 속앓이 하는 게 익숙했습니다. 


할머니가 문득 말씀하시길, 할머니가 때리면 지레 겁먹고 냅다 피할것이지 꼼짝안하고 때리는대로 다 맞고 있으니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요량으로 더 때리는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방문이나 옷장 틈새로 저를 밀어넣고 못움직이게 가두어 때리는데 도망 갔다간 그 길로 대문 밖으로 쫓겨나 문걸어 잠그셔서 밤새도록 빌어야 하는 모순이 있습니다. 


여름방학이었나 봅니다. 장마철이라 부뚜막에서 비 피하고 일주일간 굶고 마당에 쫓겨나 있었더니 여든이 넘은 집주인 할머니께서 재첩국에 밥 반공기 말아주면서 할머니 몰래 얼른 먹으라고 너 그러다 죽는다고 할머니 없을 때 소지품 챙겨서 도망가라고 뭐니뭐니해도 친부모가 낫다고 했습니다. 밥 얻어먹은 거 들켜서 또 두들겨 맞고 겨우 집에 들여주셨습니다.  


제가 반항하지 않은 이유와 성인이 된 지금도 할머니가 무서운지 묻는다면 힘으로는 제가 우세할지 몰라도 할머니 상대로 힘겨루기 한다는건 도리에 어긋난다 생각하고, 할머니와의 기억은 괴롭지만 경외심은 여전하기에 무력으로 맞서는건 불손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코끼리를 복종시킬때 족쇄를 채우고 때리는데 코끼리는 족쇄가 풀리고 힘이 강해져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경우가 제 모습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죽으라고 베개로 얼굴을 누르고 목조르기도 하셨고, 잘때 까딱이라도 뒤척이거나 이불 밖으로 손발이 보이면 곰손에 개구리발가락이라고 꼴보기 싫다고 발길질이 날아왔고, 얼굴 안보이게 옆으로만 누워자라고 얼굴에 모기약을 뿌리기도 했습니다. 


몸 전체가 상처투성이였고 피멍이 가시지 않은 채 할머니 따라 목욕탕에 가서 탈의하면 사람들이 제 몸을 보고 경악했었습니다. 그럼 할머니는 가슴을 치며 오죽하면 저렇게 때렸겠냐고 너무 말썽을 부려서 저렇게 때리지 않으면 감당이 안된다고 저렇게 맞고도 정신을 못차린다고 한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착하게 생긴 아이가 설마 그렇겠느냐 대답하거나 할머니 고함소리와 제가 비는 소리 듣고 기웃거리는 이웃들에게 제가 양의 탈을 쓴 아이라고 사람 피말려 죽이는 아이라고 순진한 척 내숭떠는 아이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쥐약 먹고 죽으라고 권하기도 하고 상스러운 욕설도 많이 들었습니다. 저한테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고 저를 산부인과 피부과에 보냈는데 의사 선생님이 아무 이상없다고 하자 돌팔이 의사라고 격분하셔서 제가 일부러 괜한 약을 처방받아 복용했습니다. 


할머니가 만족할 때까지 열번이고 연속 샴푸했고 제가 닭살피부라서 빨래비누와 주방세제와 철수세미로 씻게 하셨습니다. 제가 할머니 말이라면 똥을 줘도 먹을 아이라고 자랑 아닌 자랑 하실 때 있고 지금 돌이켜 보면 제가 북한사람 같았습니다. 


제가 안한 걸 했다고 하시며 궁예가 되어가셨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할머니 패물과 통장을 훔쳤다고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 알고보니 할머니가 너무 깊숙이 숨겨둬서 스스로 어디에 보관했는지 잊고 못찾은 거였습니다. 


간식이란 걸 먹어본 적 없어서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어 돼지저금통 동전 뽑아 하드 하나 몰래 사먹었다가 혼났습니다. 몇시간 동안 개패듯이 맞다가 퇴근하고 온 작은 삼촌이(할머니의 친자, 차남)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때리라고 만류해도 할머니가 무지막지하게 때렸는데 삼촌이 냉장고가 움푹 패이게 쾅쾅 치자 간신히 그쳤습니다. 대신 우리아들이 살면서 처음으로 화낸 거라고 네가 뭔데 착한 우리아들 화나게 했냐고 두고두고 회자되어 때리셨습니다. 


할머니가 후라보노 껌사고 잔돈 남으면 바지주머니에 넣어 두는데 그 잔돈이 없거나 줄었다며 저는 할머니가 먼저 그 얘기하기전까지 바지주머니에 잔돈이 있는줄도 몰랐는데 제가 훔쳤다고 때렸습니다. 


아니라고 결백을 주장해봤지만 할머니가 이미 단정짓고 때리셔서 바른말 할때까지 때린다셔서 너무 억울해도 어쩔 수 없이 거짓자백 했습니다.  할머니에게 바른 말이란 할머니가 원하는 대답이 곧 진실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불면증이 있으셔서 정신과에서 마약성 수면제를 처방받아 장기간 복용하시고 대장암 수술하셨고 갑상선 약 복용하시고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엄지손가락 무릎 발목이 편찮으셨습니다. 

월세와 공과금 납부하고 할머니 병원비 약값 부담하면 생활이 힘들다고 늘 돈없다 돈없다 말씀하셨습니다.  


초등학생 때 피자집 전단지 장당 20원짜리 알바를 했고 중학교 때 방문판매 알바를 했고 고등학교 때 홀서빙 알바를 했습니다. 


글짓기 그림그리기 대회에서 상받아서 차곡차곡 모은 상품권으로 할머니 향수와 화장품을 사드리고 부족하게나마 생신이나 어버이날 선물과 편지를 준비했습니다. 제가 받은 상장과 편지는 찢어 버리셨습니다. 


할머니가 피부미용 관심이 많고 패션감각 뛰어나고 입맛과 취향이 고급이셔서 유기농 야채 채소와 망고 멜론 등 열대과일 좋아하시고, 언양에 위치한 평화의원에서 눈썹 문신 아이라인 문신 검버섯 제거에 정기방문 하셨고, 대학병원 교수님 특진만 예약하셨습니다. 


패션 용도로 외제 안경테를 주기적으로 맞춤하셨고 앙드레김이나 골프웨어 전문 브랜드를 외출복으로 입으셨고 수제화 구두를 맞춤 신고 춤추러 다니셨습니다. 


저는 복지재단 세이브더칠드런 등에서 받은 후원단체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평상복으로 입고 다녔고, 체육이 없는 날에도 체육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어쩌다 옷 선물을 받으면 저는 새옷 안어울린다고 헌옷집에서 몇천원 짜리 헌옷 사주시고 여자로서 제 첫 속옷은 할머니가 젊은 시절 입다 고이 모셔둔 누래진 속옷을 울퉁불퉁 바느질해 입었습니다. 


용돈은 물론이고 준비물 살 돈도 차마 언급하기 눈치 보였습니다. 미술 준비물로 색종이를 사야 된다고 이야기했더니 냉장고에 붙은 포스트잇을 떼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 4학년 2학기때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왕따가 되었습니다. 교내에서 가장 상 많이 받았기로 호명되기도 했는데 출산 휴직으로 복귀하신 젊은 여담임 선생님을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젊은 여담임 선생님은 제가 준비물 안 챙겨오는 걸 반 친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창피주기 일쑤여서 학부모가 학급일에 관여하는 친구들 위주로 챙기던 분이셨고 제가 많이 소외 받았습니다. 


할머니는 쌜쭉하게 구는 제 성격을 탓하며 왕따 원인이 저라고 때리고 타박하셨습니다. 4학년 2학기 그 짧은 기간이 너무 길게 느껴지고 우울증으로 유서를 적었는데 걸핏하면 제 물건 뒤져보시던 할머니께 들켜서 이모한테 보여졌는데 낙서 취급하고 박장대소했습니다. 이때 맹세했습니다. 울지도 웃지도 아무 감정도 안보이겠다고. 


명절날 뵌 큰 삼촌이(할머니의 양자, 장남) 제가 이상해졌다고 말수도 적고 왜 주눅들어 있냐고 청소 좀 그만 시키라고 할머니에게 일침하자 집에 도착하자마자 삼촌이 그런 소리할 때 왜 함구했냐고 숨이 껄떡 넘어갈 때까지 매 타작을 당했습니다. 


다음 명절에도 삼촌이 계속 할머니와 언성 높여 저를 두고 다투셔서 제가 할머니 편에 서서 옹호했습니다. 삼촌은 기함하여 저를 포기하고 그 뒤로 형식적인 대화만 주고받는 방관자가 된 반면 할머니는 저에게 삼촌한테 가전제품 사달라 하라고 시켰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자상하고 포근한 인상의 담임선생님을 만나 교회를 옮기고 신앙심이 생기자 우울증을 극복했습니다. 

공부가 쉬워지고 저절로 성적 오르고 교우관계도 회복되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담임선생님은 매번 제 일기를 채택해서 읽어주시고 팝송을 가르쳐주던 분이셨습니다. 


리코더가 초등학교 음악시간 내내 필수 준비물이었는데 리코더는 비싼 축에 들어서 초등학교 6년간 리코더 필요하다고 말 못하다가 졸업 앞두고 할머니가 우연히 알게되셔서 리코더를 사주셨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아침을 거르고 고등학교 때부터 위염 때문에 보건실에서 겔포스를 달고 살았습니다.  교통비가 일주일에 만원 지출이었는데 만원을 건네주며 한달을 사용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한시간 거리를 걸어다니며 교회와 학교에서 밥, 국, 반찬 포장해오고 수돗물 끓이기 싫다셔서 생수 2리터짜리 2병 길어오는데 귀가시간 1분1초 시간재셔서 지름길 찾아 교복 치마 입고 책가방 짊어지고 비오는날 가파른 언덕 미끄러져가며 뒷산을 넘나드느라 지치고 힘들었습니다. 


전기 아깝다고 숙제도 공부도 못하게 하셨고 시험기간 제쳐두고 할머니 옆에서 6시내고향 생생정보통 가요무대 전국노래자랑 할머니 취향의 방송을 같이 봐야했고 아무런 동요없이 앉아있으면 귀신같이 멀뚱멀뚱 앉아있다고 리모컨 던지고 때리셔서 억지로 재밌는 척 연기해야 했습니다. 


동사무소에서 종량제 봉투를 무상제공 하는데도 비상용으로 아낀다고 등교길과 취침 전에 으슥한 곳에 쓰레기 무단투기 시키셨고 삼성생명 건물에 철쭉 나무를 뽑아오는데 앞장세워 훔치는데 가담 시키기도 하셨습니다. 


꽃집 외부에 진열된 화분을 낑낑거리며 훔쳐 왔고 실상은 그저 도둑질인데 할머니도 뜨끔하셨는지 너브러져 놓은 물건 가져다 요긴하게 가꾸면 그쪽은 치워줘서 고맙고 우리는 필요해서 좋고 서로 이득이라고 포장하셨습니다. 


방학 땐 밥만 축내는 식충이라고 역정내셔서 눈치보였고 동사무소에서 일일 3천원짜리 식권을 지급하는데 아무거나 안드시는 할머니가 우선이었고 할머니 식사에 주로 소진했습니다. 


저는 항상 거짓된 삶을 살았습니다. 안해도 했다고 해야했고 준비물 못챙겨온 이유를 맨날 깜빡해서라고 거짓말 해야했고 똑같은 옷만 주구장창 입고다니면 두벌 번갈아 입는다고 거짓말 해야했고 생리대 빌리려고 거짓말하기 일쑤였습니다. 안한 걸 했다고 했을 때 억울한 지경을 넘어 내가 꿈을 꾼건지 현실이 분간이 안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타고나기를 허리가 부실하고 빈혈 편두통 심하고 아프면 약국약은 안듣고 처방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아야만 호전되고 피곤하면 급성 편도염 임파선염 등 입병 목병이 자주 도지는 체질입니다. 


호흡기 기관지가 약해서 목에 손수건을 감고 다니고 추위를 극심하게 타서 한여름 빼고 내복 입고 매년 겨울만 닥치면 얼린 생선 마냥 수족냉증이 심해서 동상 전 단계라는 동창에 걸리곤 했습니다. 


스무살만 되면 저는 제가 완벽한 어른이 될 줄 알았습니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회 소고기 실컷 사드리고 나름 여유있게 살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가난과 악습을 대물림 하기싫어 초등학생 때부터 절대 결혼하지도 아이를 낳지도 않으리라 굳은 다짐을 했고 평생 할머니 모시며 살 줄 알았습니다. 


평일 낮에 대학 다니고 평일 야간 12시간 알바하고 주말 낮에 소홀했던 집안일과 청소 및 정리하고 할머니 쇼핑 동행 짐꾼하고 주말 야간 10시간 알바해서 번 돈으로 몽땅 할머니 드리고 할머니는 홈쇼핑 중독과 헬스 중독에 빠지셨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할머니의 건강 악화와 동시에 탈장 증세로 의료사고 당하셔서 저의 대학등록금 전액을 할머니 병원비로 이용했습니다. 저는 체력도 방전되고 뺑소니 교통사고와 묻지마 집단폭행 (가해자 백문주) 당해서 더이상 일하기 힘들었습니다. 


지문이 닳도록 일했고 손가락 마디마디 찢어져서 구부리지 못하고 접촉성 피부염 (주부습진) 진단 받았더니 명절에 뵌 숙모는 (할머니의 며느리) 아니라고 무좀이라고 퉁명스러우셨고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터져서 절뚝거리며 모은 돈을 할머니 손자 초등학교 입학선물로 100만원인지 200만원인지 줬다고도 합니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동생이라 아깝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나와 한 공간에서 숨쉬는데 매일 담배 한갑 구멍가게 심부름 시키고 담배 피실때 망보라던 할머니가 한달에 한번 볼까말까한 손자는 뽀뽀하고 싶어서 단번에 금연하셨고 


나 군것질 안하고 푼돈 모아 할머니가 좋아하는 양갱 젤리 전병 홍삼캔디 항상 사다드렸고 갖고 싶다던 가방 신발 사드리면 이모가(할머니의 딸) 보내준 거라고 할머니들에게 자랑하고 이모에게 선물하기도 하고 


저는 사랑받고 싶어서 물질적으로 할머니의 환심을 사려고 했고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잘해도 순간뿐이고 할머니의 과욕만 불러일으키게 했습니다. 


할머니는 할머니의 자녀가 자상하게 대해주는 것만으로 훨씬 기뻐한다는 사실과 제가 고생한 게 할머니의 홈쇼핑 중독, 헬스 중독, 할머니 위신과 체면 차리는데 일회성으로 쓰이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저에게 집이란 안락한 휴식 공간이 아니라 노동하는 곳이었습니다. 공부할 나이에 돈을 좇은 게 부질 없고 허무해서 삶의 목적이 희미해졌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의욕도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연락 뜸하던 느아빠가 연락왔는데 다쳐서 다리 잘라야 된단다고 장애인이라더라 고년은 죽었단다고 잘되졌다고 후련해하셨습니다. 


부모와 절연한지 십수년이 훌쩍 지나 흐릿한 기억속의 부모라는 존재가 새삼 와닿지 않고 실감나지도 않아 무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 할머니가 충치로 틀니나 임플란트를 하셔야 했는데 비용 저렴한 틀니는 거부하시고 보험 안되는 수입 임플란트 원하셔서 치료가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삼촌이 할머니 잘 모셔달라 당부했었고 금전 문제는 연락하라 했기에 삼촌에게 소식 전했더니 통장에 700만원인지 7000만원인지 밖에 없어서 당장 못해준다고 어물쩍 넘어갔습니다. 


할머니가 치통으로 씹지 못해서 누룽지 숭늉이나 미음 죽으로 식사하느라 나날이 여위어 가는데 가만히 지켜볼수만 없고 진통제 못버티시자 짜증내고 성화부리셔서 조바심이 났습니다. 


할머니가 실질적으로 날 부양하는건 너니까 삼촌한테 떳떳하게 할말 다해도 된다고 부추기셔서 처음으로 삼촌에게 울먹이며 감정적으로 따졌습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은 할머니 생각해주는건 고마운데 네 엄마 아니고 내 엄마라고 내 엄마는 내가 더 잘 안다 였습니다. 


할머니가 칭찬 일색하던 법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성실하고 우직한 삼촌인데 알고보니 해운대에 아파트 마련하고 4년 이상 외도까지 하고 있었다 들었습니다. 


할머니의 금전 재촉이 심해지고 거리에 나뒹구는 명함 주워다 일수 사채 알아보고 열쇠집에서 2000원 주고 인감도장도 팠는데 마지막 절차에서 만19세 미만이라는 이유로 무산되어 도저히 빈손으로 귀가할 자신이 없어 집 주변 맴돌다 기어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졸지에 동전 한닢없이 가출을 저지르게 되어 서면 롯데백화점 영광도서 교보문고 부전시장을 배회하고, 할머니가 다니시던 동의의료원 백병원 봉생병원 동아대학병원 부산대학병원 돌아가며 응급센터 대기실이나 중환자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척 연기하며 밤을 지새우고 낮엔 하염없이 걸어 다녔습니다. 


하루 이틀 친구집 언니집 얹혀자고 2년간 찜질방 전전하다 겨울날, 바다에서 자살시도 했었고 살아서 다시 알바를 구해서 간간이 생필품과 식료품을 몰래 두고 가고 할머니 돈 보내드리다 할머니 생신에 용기내어 연락하자 이모와 연결되었는데 이모의 제안으로 낯선 부천으로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이모가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왜 그렇게 된건지 물어서 내막을 얘기했더니 할머니의 말 90%는 거짓말이라고 들으면 된다고 그래서 안도와주는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일축했습니다. 


삼촌과 이모가 할머니를 부양하지 않는 이유가 차라리 돈 많은 할아버지랑 재혼해서 자식들 고생 안시켰으면 했는데 티켓다방 운영해서 번 돈 사치향락으로 탕진하고 이모가 중학교 시절 다방에서 등하교하기 쪽팔렸다고 합니다. 저한테는 양정 굴다리 2층 복다방이라는 다방을 해서 아가씨들 고기 해먹이고 맞춤 정장만 입고 다녔다는 무용담이 알고 보니 티켓다방이었던 겁니다. 


삼촌 이모도 눈치껏 제가 호되게 맞는 거 알고 있었다고 네가 미련해서 맞고 자란 거고 세상에 너보다 힘든 사람 많다고 사지 멀쩡하면 다행이고 괜찮답니다. 

제가 꾹꾹 감추어서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다들 알고 있었다는 말이 충격적일 정도로 놀랍고 배신감 들었습니다. 


제가 애정결핍 고슴도치 성격이 되었다며 이모가 지식은 가르쳐줄 수 없지만 지혜는 가르쳐줄 수 있다고 해서 감동 받았는데 20년 가까이 사이비종교 간부(교령) 활동 중이었고 문란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건강을 치유해준다는 명목으로 치성드려야 한다고 제사비 50만원, 다달이 정성이라는 금전 요구, 사이비종교를 강요하고 매번 집에 새로운 이성을 초대하는데 이모집이라고 생색내며 청소시키고 내쫓았습니다. 


PC방이나 카페라도 가있게 돈 좀 달라 하면 뙤약볕에서 아픈 다리와 맞지 않는 신발로 무작정 운동이나 하라하고 한겨울에 야상 입고 쫓겨나 담배 냄새 풍기는 비상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시간 보냈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이모 유부초밥 과일 도시락을 만들고 떡볶이 볶음밥 된장찌개 등 이모 아침 식사를 차리고 커피와 빵 간식을 준비하고 1년 넘게 이모 허드렛일 해주며 틈틈이 알바했는데 헤프게 쓸까봐 이모가 관리해준다고 돈 내놓으라 하고선 춘의동 동서가구 화장대 사는 돈으로 쓰고, 저에게 토리버치 가방 100만원밖에 안한다고 선물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모가 병원과 제가 원하는 방송직종 일자리를 소개시켜준다고 약속했는데 병원은 스스로 해결하라 번복하고, 평창 휴게소나 염색 화학공장에 기숙 생활을 권유하며 제 급여 전액을 이모가 관리하겠다 했습니다. 


저의 간절한 소원은 미성년자 취급해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경제적인 조건은 이모와 동일시하며 이모 지인들에게 망신을 주기도 했고, 저를 도매니저라고 부르며 천송이 역할에 심취하며 매일 미션이라고 손빨래 청소 차비없이 심부름 시키고 언제 어디서든 호출하면 곧장 튀어나가 짐꾼해야 했습니다. 


이모가 간통으로 두번 이혼하고 양다리 걸치고 누구 아이인지 몰라 낙태하고 한미약품 직장인을 속여 재혼을 염두하고 있었습니다. 

두아이 모두 양육권 포기하고 주말마다 나이트클럽 다니고 소개팅 앱으로 원나잇 하는데 그럼 나따위는 안중에도 없겠다 라는 생각을 뒤늦게 했습니다. 


할머니가 숙모에게 무시 당하면 저에게 분풀이 하셨고 이모가 이혼하고 삼촌이 외도한 걸 저를 탓하며 때리고, 부엌칼을 던져 종아리가 베여 피가 철철 난 적도 있고 할퀴고 꼬집어 얼굴 가슴 목에 생채기 나서 단짝 친구만 알아채고 제 부모를 모욕하는 건 예사였습니다. 


너무 긴 노숙 생활과 방랑 생활을 했고 온전히 저만의 시간을 가지고 생각했더니 결국 남은 남이었다는것 사람간의 교류 못하는 사회성 결여된 바보가 되어 있었습니다. 손발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덜덜 떨릴 때가 있습니다. 


제가 없으면 할머니는 아무것도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옆에서 안챙기면 헷갈려서 약 못먹을까 봐 제가 조퇴 결석해서 출석일수 모자라가며 모시고 다니던 병원 헤매고 못다닐까봐 전전긍긍 걱정했는데 전혀 아닌 걸 알고 나서 잘못된 내 선택에 후회가 밀려와 과거에 연연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은 흐르는데 잡생각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쫓기는 심정이라 단체 생활이 마음 졸이고 사람들 눈초리가 따갑게 느껴져 숨고 싶고, 턱관절장애 섬유근육통 햄스트링 근육파열로 아파서 기다시피 했는데 병원비 부담에 치료 미룬 게 지금까지 이어져 불편 겪고 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임금체불 겪는데다 밑천이 없으니 당장 벌어야 해서 일용직을 하게 되었고 파출부 택배상하차 물류센터 등 험한 일 밖에 할 수 없어 부상이 잦았습니다. 허리가 아파 벽잡고 걷고 양치하는데도 허리가 당겨서 억소리 나고 통증이 심해 엎드려 쉬어야만 했습니다. 


TV에서 신동엽이 시선도 폭력이라고 말하는데 꺼이꺼이 울었고 차인표 신애라 부부가 입양한 아이들이 부러웠습니다. 동물농장에 나오는 유기견이 제 모습 같아 한심하고 처량해서 식물인간처럼 멍청하게 보름동안 굶기도 했습니다. 하루종일 눈알 빠질 것 같이 울다가 미칠 것 같아 폭식도 했는데 마음은 채워지지 않고 헛헛합니다. 체력은 독거노인처럼 무기력한데 제 자아는 그때 그 시절에 멈춰 있습니다. 


학자금 대출과 중복지원금 주택공사 대출 이자, 가출 시절 통신비 미납으로 신용불량자로 전락했고 최근 이전 직장에서 성추행 당했으나 윗선에서 중립이라는 이유로 마무하는 바람에 부당해고 격으로 퇴사 후, 코로나가 격상되어 실직 상태로 지냅니다. 


폐렴인지 폐결핵인지 싶게 드라마 장면처럼 신기했던 쿨럭쿨럭할 때마다 피토하고 음식 조금 먹자마자 게워내고 마른 기침이 멎지 않기도 있고 기립성 저혈압 위궤양 위경련으로 주저앉기도 하고 늘 달고 사는 안구건조증, 철결핍성 빈혈, 요통 잔병치레로 병들어 가는 기분입니다. 


약 3년 전 부터 세상에 알리려고 괴로울 때마다 커뮤니티에 사연을 적은 적 있습니다. 방송3사에서 인터뷰 제의 받았으나 자극적인 소재로 관심보이다 증거불충분으로 흐지부지 되었고, 주작이라고 죽으라는 일반인들의 악플을 읽고 사람들 속마음은 이렇구나 라는 생각에 트라우마가 생겨 대인기피증이 심해졌습니다. 


글로 다 옮겨적지 못한 내용도 많고 주저리주저리 쓸데없는 내용도 많습니다. 다만 거짓말을 보태거나 저 유리하게 부풀리지 않았습니다. 최면조사 거짓말탐지기 정신감정 뭐든 적극 응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ㅠ입니다 

지금 새로운 여성 변호사를 선임계를 통해 선임을하고

해당 검찰청과 경찰서에 같이 동석하여

세상에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여성분의 제대로 된 진술을 위하여 조사를 받게 할것입니다

현재 첼로프린스는 서울에 너무 열악한곳에 살고 계시는터라 다음주에 오피스텔 얻어드리고 15년간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못했기에 교육기관에 교육도 받게 해드리고 상담원 상담치료 그리고 건강검진 둥등 나아가서 제 회사에 채용을 하여 밝은 사회에 나와 정착할수 있도록 도움드릴것입니다

 

아울러 법적으로 책임을 물어 현재 모든 법조항을  최대한 적용하여 고소를 준비중이며 고령임에도 꼭 무기징역 받을수있도록 노력할것입니다

보배님들의 응원과 댓글로 동참하셔서 격려 부탁드리고 보배의 위대함으로 세상에 알려서 관련자들 모두 처벌받길 간절히 동참 부탁드립니다 

다른 좋은 소식도 많지만 오늘은 이ㅠ여성분을 위해서만 글 올립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추천해주셔서 널리널리 퍼지게 도움 부탁드립니다

보배님들 사랑하고 사랑합니다♡♡♡ 

 

PS-보배님들 어떤 어려움이든지 망설이지 마시고 24시간 쪽지 열려있으니 쪽지 주세요 모든 문제를 법적인 도움드리겠습니다

주저하지말고 연락처 그리고 사연 보내주세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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