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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성x | 20/10/29 12:04 | 추천 74 | 조회 1750

기레기들과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365 [15]

보배드림 원문링크 https://m.bobaedream.co.kr/board/bbs_view/best/362500

 

한 권의 시집을 얻기까지


김형. 오래전 주신 질문에 이제야 답을 드립니다. ‘그 사건’ 이후 우연히 어느 커뮤니티를 통해 만난 김형은 언젠가 다 늦은 저녁의 카페에서 내게 물었습니다. 그런 끔찍한 시간을 어떻게 견뎠냐고 어떻게 보냈냐고요. 저는 그때 제 이마나 머리카락이나 만지작거리면서 그냥 쑥스럽게 그 질문의 속살을 피해서 엷은 미소를 김형에게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하지 않았지요. 이제는 나뭇잎의 잎맥같이 또렷하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제출할 수 있는 답변은 아주 간단합니다. ‘시’ 때문입니다. 시를 쓰면서 견뎠습니다. 


2015년 가을, 네 번째 시집 원고를 엮고 문학과지성 편집위원으로 있는 강동호 씨를 경유해서 문학과지성 편집장 이근혜 씨에게 시집 원고를 보냈고 빠르면 2018년 늦어도 2019년에는 네 번째 시집을 내자고 구두로 계약을 했었지요. 당연히 시집 제목은 없었고 마음으로만 <물속의 눈보라>라고, 저는 점찍어 둔 상태였습니다. 2016년 늦여름 즈음에는 제법 시집의 얼개가 짜이고 시집의 창문이라든가 바닥, 현관의 구조 같은 것을 혼자서 설계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 ‘그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지요. 


‘그 사건’을 겪으면서 버티면서 견뎌 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바로 ‘시’와 ‘시집’이었습니다. 스물네 살에 등단해서 할 줄 아는 거라곤 그게 유일한데 ‘이제 못하게 되었구나’, 하는 상심은 김형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겁니다. 시는 제게 그러니까 거의 종교에 육박하는 구원이었지요. 잦은 공황발작과 우울증으로 2,30대 전체를 보내면서 제가 제 자신을 그나마 돌보고 정신의 근육을 키울 수 있었던 건 다 ‘시’ 때문이었습니다. 시 한 편을 겨우 다 쓰고 동트는 새벽하늘을 맞는 고요한 기쁨을 김형에게 언젠가 말한 적이 있지요. 그 시간들의 겹주름으로부터 제게는 ‘하와와’ 아무 뜻 없는 말을 혼자 발음해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하와와, 사람의 마음을 참 가볍게 해 주는 언어 아닙니까, 김형. 


일단 ‘그 사건’ 이후, 긴 글을 거의 쓸 수 없었습니다. 생전 처음 접하는 법률 용어들, 그리고 내가 살펴야 하는 법률 자료들, 증거들, 그리고 변호사들에게 보내야 하는 수많은 문서들을 작성하며 저는 아주 넌덜머리가 났었습니다. ‘그 사건’이 2016년 10월이니까 대략 1년 정도 저는 시를 못 쓴 셈입니다. 먼 기억으로는 네 번째 시집을 엮고 ‘사랑 이야기로 온전한 시집 한 권’을 세상에 내보이자고 혼자서만 다짐했었더랬죠. <하와와, 너에게 꽃을 주려고>라는 시집은 그 먼 훗날의 계획을 조금 앞으로 당긴 시집입니다. 


시가 쓸데없이 길어지는 일을 경계하고 지극히 단순해지는 일, 명료해지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숨을 쉬는 일이 제게는 필요했습니다. 어떤 온전한 ‘나’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고요’에 육박하는 ‘당신’이 필요했습니다. 애초 사랑은 그런 것이지요. 비대한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나’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온전히 ‘타인’인 ‘당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는 일, 그래서 겨우겨우 당신을 숨 쉬게 하는 일. 숨소리 나지 않게 숨을 쉴 때 그때, 겨우 ‘타인인 당신’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2017년부터 짧은 시 150편을 썼고, 그 중 70편 정도를 묶은 게 지금의 시집 <하와와, 너에게 꽃을 주려고>입니다, 김형. 


시집을 내준다는 곳이 없어서 블로그와 SNS에 ‘시집을 내줄 수 있는 출판사를 구합니다’라는 글을 올렸었고 지금의 <미디어샘> 출판사 신주현 시인께서 연락을 주셨었습니다. 연신내에 작은 사무실을 둔, ‘시각디자인 전문 출판사’에서 저의 시집을 낼 수 있었던 뒷이야기입니다, 김형. 


시집을 드려야 하는데 주소도, 전화번호도,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김형. 먼 데 소식으로 벌써 시집을 구해 읽으셨을 걸 압니다. 교보문고 집계 베스트셀러 종합 8위, 시/에세이 1위, 2020년 10월 29일의 숫자들입니다, 김형. 한줌 언어에 불과한 시의 가치는 숫자로 가늠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문단’이라는 ‘철옹성의 카르텔’에다 대고, 저 악랄한 ‘쓰레기 언어 공동체’ 기자 집단에 대고 제가 시위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군요. 이 독기가 다 빠질 때 즈음 저는 또 다른 언어를 얻을 수 있겠지요. 멀리서 제 시집을 구해서 읽으셨다면 오늘은 주위 사람에게 이 시집을 선물해 주셔요, 김형. 멀지 않은 날 제 손으로 직접 저의 시집을 드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백지에다 꾹꾹 김형의 이름을 눌러쓰는 아침입니다. 아무리 글씨를 많이 써도 그 활자를 활자이게끔 지켜주는 것은 하얀색 백지 공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또한 압니다. 한 권의 시집을 우연히, 삶의 어떤 소용돌이 속에서 고스란히 얻었습니다. 이 시집을 엮으면서 얻은 힘으로 또한 열심히 저 철옹성의 카르텔과 거짓 쓰레기 언어의 집단들과 싸워보겠습니다. 김형의 말처럼 끝까지 한번 가보겠습니다. 아침 공기에 섞인 몇 줌 바람들이 파르르르 떨고 있습니다. 


 - 박진성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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