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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L | 20/06/05 06:47 | 추천 0 | 조회 712

전설이 된 가족 - 9화 +294

SLR클럽 원문링크 m.slrclub.com/v/hot_article/767189


아빠와 형은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서둘렀다.
폴라리스의 앞 유리를 떼어내고 온실용 폴리카보네이트를 잘라 붙였다.
강성도 좋고 탄성이 있는 두툼한 재질이라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다.
비닐 재질의 창문 역시 렉산으로 보강을 마쳤다.
석궁을 조수석에 실어두고 알루미늄 배트와 짧은 손도끼를 A필러 옆에 붙여놓았다.

“희수야~ 좀 도와줄래?”

나는 송풍기로 농막과 태양광 패널에 쌓인 노란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비도 안 오는데 뭐가 그리 급해?”
“모르지. 요즘 들어 비가 점점 잦아지고 있잖아.”

확실히 이상기후였다.

“밤 날씨는 예년과 비슷한데 낮 기온이 많이 올랐어.”
“어쩐지 덥더라.”
“개복숭아 꽃이 벌써 피었어.”
“빠르네.”
“무려 40일이나.”

난 형이 식물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몰랐다.

“창고에 기름통이 몇 개 있을 거야. 새 걸로 네 개만 실어 놔.”
“응, 알겠어.”

폴라리스의 적재함은 그리 넓은 편이 아니었다.
기름통과 카고박스 4개를 쌓아서 밀어 넣자 더는 남는 공간이 없었다.

“탄력 바 묶을 줄 알아?”

형은 적재함 위로 방수포를 씌우고 있었다.

“아니, 몰라.”
“조수석 의자 열면 있어. 가져와. 고무로 된 로프야.”

납작 파스타처럼 생긴 검은색의 고무 바였다.

“이젠 너도 배워둬야 해. 틈틈이 연습해 둬.”

형은 능숙한 솜씨로 바를 이리저리 둘러 적재함을 단단히 고정했다.

“형은 어디서 배웠는데?”
“아빠가 하는 거 봐뒀지.”

만약 한 달 전에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둘째 형을 지목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보다 다정하고 든든한 친구였다. 아빠처럼.


오후부터 거짓말처럼 비가 내렸다.
구름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먼 곳에서 번개가 치는 모양이다.

“무리하지 말고 조심하세요.”
“해지기 전에 돌아올게.”

“희수야, 엄마 잘 부탁한다.”
“엄마, 비 맞지 말고 들어가세요.”



오후 한 시. 폴라리스는 농장을 떠났다.

“엄마는 희수가 얼마나 듬직한지 몰라요.”

엄마가 어깨에 어루만지며 안아주셨다.




오후 한 시

블레이드가 닳아있는 데다 새로 붙인 유리창과의 이격 때문에 와이퍼는 빗물을 제대로 밀어내지 못했다.
이래서는 앞이 보이질 않았다.

“아빠 잘 안 보이죠?”
“그러게, 발수제라도 뿌려둘걸.”

빗물이 흐르는 창 너머,
포마렐루에 점령당한 저수지의 생태계가 보인다.
슬픈 봄비였다.

남훈과 해수를 태운 UTV는 저수지를 지나 마을의 포장길로 내려왔다.
마을의 논과 밭 곳곳에서도 모아이의 석상처럼 서 있는 놈들을 볼 수 있었다.
저수지에서 보았던 개체들보다 키가 조금 더 커 보였다.

“어윽! 냄새!”

익숙한 계분 냄새가 난다.
매년 봄철이면 마을 전체가 이 염기성 비료의 냄새로 뒤덮이곤 했다.

“이상한데?”
“뭐가요?”

그의 가족이 혼란을 피해 벙커로 숨어든 지 3주가 채 안 되었다.
겨우내 놀렸던 밭에 거름을 놓기엔 너무 이른 계절이었다. 땅도 풀리기 전이었다.

남훈은 폴라리스를 길가에 잠시 세우고 비를 맞으며 밭으로 다가갔다.
이랑에 서 있던 포마렐루가 잠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남훈과 해수 때문은 아니었다.

“징그러운 놈들!”

밭 여기저기에 거름을 포대 채 엎어놓은 것 같은 검은 둔덕이 보였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해수가 뒤로 물러난다.

“아빠, 이거 아무래도…. 사람 같아요.”

남훈은 천천히 농부의 시체 옆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래턱에 붙은 금니가 아니었다면 몰라봤을 것이다.

두개골의 형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바짝 불에 구워진 것처럼 쉽게 바스라 졌다.
빗물을 머금어 보슬보슬해진 형태가 정말 계분처럼 보였다.
포마렐루가 소화를 끝낸 시체는 이런 과정을 통해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밭 위의 흔적들이 모두 사람들의 사체….’

주변엔 적어도 수십 개의 둔덕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훈은 화가 나거나 흥분하지 않았다.
저수지의 포마렐루를 발견한 이후,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서두르자.”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초등학교와 교도소가 보였고 그들은 곧바로 외곽도로에 진입했다.
멀리 있는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폴라리스의 소음 때문에라도 몸을 숨기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한 달 전까진 잘 포장된 도로였다.
포트홀을 밟을 때마다 웅덩이의 물이 위로 튀어 올랐고
들고일어난 아스팔트를 지날 때면 땅이 꺼지는 느낌 때문에 깜짝 놀랐다.

왕복 차선 여섯 개를 모두 써도 될 만큼 도로는 한산했다.
군데군데 멈춰선 포마렐루 자체가 종말 문학의 클라셰였다.
사람이 사라진 도시를 지키는 거대한 기둥 같았다.

“시내로 갈수록 놈들 덩치가 커지네요…….”
“그러네…….”

해수의 말마따나 마을의 포마렐루와는 느낌이 달랐다.
키가 2m에 가까운 녀석도 흔했고, 커진 덩치를 받치기 위한 받침뿌리들 또한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늘어난 총열과 구경만큼 총알의 위력도 세졌을 것이다.
남훈은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다행히 시골 마을처럼 버려진 사체나 무리진 포마렐루의 군락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 어딘가에서 잘 버티고 있었으면 좋겠다.’

들러 보기로 한 대형할인점 앞을 지나는데 정문 유리는 깨져있었고 입구엔 빈 쇼핑카트가 뒹굴고 있었다.
곳곳에 폭력과 약탈의 흔적이 난무했다.

“폭동인가요?”
“글쎄….”

사람의 인기척은 없었지만, 도저히 마트 안으로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마트는 포기야.”
“아…. 세탁비누 가져가야 하는데.”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졌다.
폴라리스는 속도를 높여 석사 천까지 내달렸다.

굴다리를 지나자 코끝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역한 냄새가 스쳤다.
큰 도로에선 보이지 않던 토사물 덩어리가 보이기 시작했고 하천에 몸을 담근 포마렐루가 많아진다.
빗물에 씻겨온 가루 때문에 하천은 온통 노란색이다.


첫 번째 방문지는 남훈의 단골 카센터였다.
주차장 아스콘이 벗겨진 틈으로 잡풀이 자라고 있었다.

“드르륵-”

사무실 문은 열려있었지만, 침입자의 흔적은 없었다.

“아이고, 오명아….”

남훈은 허탈해진 듯, 주인 없는 사무실에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주문해놓고 이제야 찾아가는구나.”

폴라리스용 타이어를 지붕에 올리고 탄력 바로 결속했다.

“계산은 나중에 만나서 하자.”

각종 엔진 오일과 윤활유, 작은 사이즈의 와이퍼도 몇 개 실었다.
남훈은 어항 청소용 자바라로 다른 차량의 기름을 뺏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직접 배운 기술이었다.

“친구분께 너무 민폐 아니에요?”
“그러게. 메모라도 남겨야겠다.”

도심의 주유소는 폭도에게 습격받기 좋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민경이네 들러 볼까?”

갑자기 해수의 얼굴이 붉어진다.
남훈은 피식 웃는다.

“여기선 우리 집보다 가깝잖아.”

한동안 연락이 끊기긴 했지만, 가장 친했던 친구 현모의 근황이 걱정되었다.
두 가족의 사이가 소원해진 데는 해수 탓이 컸다.



현모의 집 유리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1층은 상가였고 2층은 전체가 세를 받는 원룸이었다. 그리고 3층이 현모의 살림집이다.

손도끼로 무수고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건물 안에 숨어있는 사람들에겐 안전을 위협당하는 행동이었다.
그동안에도 빗줄기는 점점 가늘어져 이슬비가 되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어디론가 잘 피신했을 거야. 그만 돌아가자.”
“제가 배관을 타고 올라가 볼게요.”
“해수야…….”

해수는 탄력 바를 잘라 허리와 정강이에 묶었다.
그리고 가스 배관을 손으로 움켜잡는가 싶더니 금세 3층까지 도달해 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남훈은 폴라리스의 키를 빼고 한쪽 바퀴를 잠가버렸다.

1층 유리문이 열렸다.

“집 현관문은 잠겨있던데요.”
“올라가 보자.”

2층 원룸 복도는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남훈은 비와 땀에 젖은 손으로 야구 배트를 꼭 움켜쥐었다.
3층으로 올라가는 철문이 열려있었다.

“방금 제가 열어놓은 거예요.”

몇 번인가 초인종을 눌렀지만, 반응이 없다.
잠깐 망설인 남훈이 도어락의 키패드를 열었다.

‘0. 5. 2. 2’

‘띠리리릭~’ 문이 열렸다.
현모의 딸 민경의 생일이었다.

“웁!”

냄새였다.
남향으로 난 거실 통창이 온종일 해를 받는 현모의 집에선 날 수 없는.
퀴퀴하고 어두운 지하실의 냄새였다.

주방 식탁과 싱크대엔 먹고 버려진 캔과 설거지를 못 한 그릇이 널려 있었지만
남은 식량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고 나름 정돈하려 애를 쓴 것 같았다.

현 모 부부는 어두운 안방에 누워있었다.
바닥은 차가웠고 닫힌 창엔 암막 커튼이 드리워있었다.

“현모야!”

남훈의 큰소리에 남자의 눈이 잠시 떠지는가 싶더니 다시 감겼다.
얼굴은 흙빛이었고 앙상한 뼈와 피부 사이에 지방이나 근육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 좋은 아저씨의 변한 모습에 해수는 충격을 받았다.

“너…. 어찌 된 거야!”

현모의 시선이 잠시 옆을 바라본다.
옆에 누운 부인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제수씨는 또 왜….”

말라버린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일어날 수 있겠니? 우리 집으로 가자! 회복할 수 있어!”

초등학교 때 수영을 했던 현모의 넓은 어깨와 얇게 갈라진 활배근은 그의 자랑이었다.
누운 현모의 몸을 세우려던 남훈은 깜짝 놀랐다.

“헉! 하악….”

그의 몸은 끈적하고 축축했다.
이미 생명의 흔적은 사라진 가죽만 남은 몸이었다.

“아, 아파….”

남훈 때문에 강제로 비틀린 몸이 고통스러웠는지 그제야 현모의 눈이 떠졌다.
욕창 난 피부로 들어온 공기가 한겨울 한기처럼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찔러댔다.

깊게 팬 눈엔 초점이 없었고 눈동자는 회색빛으로 탁했다.
이미 시력을 잃은 상태였다.

“남훈아….”
“그래! 이 멍청한 자식아!”

‘하악하악’

현모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한 거야! 왜 누워만 있었어!”
“너…. 넌…. 괜찮아?”

현모는 느리지만, 끈기 있게 입을 움직였다.
말을 뱉어낼 때마다 물기 하나 없는 혀가 안으로 말려들어 갔다.

“괜찮지! 가자! 밑에 차가 있어! 우리 집에 가면 네가 좋아하던 빼갈도 있고….”

남훈은 그만 눈물을 터트렸다.
현모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부…. 부탁…….”
“그래 부탁, 말해.”

“우리 딸…. 데려가 줘.”
“그래, 당연하지 인마! 너도 데려가고 다 데려갈 거야! 우리 살아야지!”
“아파…. 비가 오면 아파….”

현모는 지친 탓인지 다시 눈을 감았다.
이미 자신의 몸은 상태는 되돌릴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훈 또한 마음이 복잡했다.
적재함의 물건을 모두 비운다 해도 환자를 태울 공간이 여의치 않았다.
직각에 가까운 불편한 의자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창문…. 창문 열어 줘….”

남훈은 해수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해수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밀려왔다.
비는 이미 그쳤다.

“이제 꽃가루가 올 거야. 그럼 아프지 않아….”
“이런 제길! 말도 안 돼!”

심각한 중독 상태였다.
현모는 어서 꽃가루를 마시고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딸 얼굴을 봐야 하는데….”

현모는 신과 자신의 딸에게 용서를 구하며 눈을 감았다.

창밖엔 노을이 시작되고 있다.
노란빛을 띠기 시작한 안개는 버려진 도시의 풍경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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