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게 실시간 커뮤니티 인기글
종합 (4007360)  썸네일on   다크모드 on
더비승격.. | 20/01/21 02:31 | 추천 44 | 조회 424

[장문칼럼] 잉글랜드 최초의 골잡이, 스티브 블루머 +62 [5]

에펨코리아 원문링크 https://m.fmkorea.com/best/2623208484

PicsArt_01-19-04.38.52.jpg [장문칼럼] 잉글랜드 최초의 골잡이, 스티브 블루머
Steve Bloomer's watchin',?
스티브 블루머께서 보고 계셔?

Helping the fight,?
전투를 도우시며,?

Guiding the heroes,?
영웅들을 흑과 백의 군단으로?

In the black and the white.?
인도하시네.?

.?
.?
.?

And if you love or hate us,?
그리고 네가 우리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Just wait until we score.?
그저 우리가 득점하는 것을 기다려.?

- Steve Bloomer's Watching 中 -?

앨런 시어러부터 해리 케인까지, 21세기 잉글랜드에는 골잡이 풍년이 들었다. 잉글랜드의 골잡이들은 경기력이 좋든 좋지 못하든 끝내 득점에 성공하며 그들의 조국에 승리를 선사했고, 해마다 현 골잡이의 후계자를 배출하는 것은 로컬 팀의 숙명과도 같이 여겨진다.?

공격수의 역할이 점점 다양해지고 "공격수가 무조건 득점하는 시대"가 점점 사라져가는 토탈 풋볼의 시대에서도 잉글랜드의 골잡이들은 명백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리 케인과 같은 골잡이들은 분명 경기마다 좀 더 수비적인 롤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잉글랜드 골잡이"는 분명 살아있으며 오늘도 어딘가의 로컬 클럽에서 미래의 잉글랜드 골잡이가 탄생하고 있다.?

앨런 시어러, 해리 케인, 혹은 미들라이커 프랭크 램파드가 오늘날 잉글랜드 골잡이의 롤모델이 된다면, 분명 그 전에 룰모델이 되었던 선배가 존재했을 것이며, 그 전, 그 전으로 올라가면 "잉글랜드 골잡이"의 시작을 알렸던 사람도 존재했으리라.?

시대를 거슬러 19세기로 돌아가보자.?

풋볼 리그가 탄생했던 그 때로 돌아가 이스트 미들랜즈 지방에서 이름을 날리던 한 사람을 떠올리면, 분명 최초의 "잉글랜드 골잡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풋볼 리그 초창기 혜성과도 같이 등장한 "최초의 골잡이". 오늘은 스티브 블루머에 대해 알아본다.?
St_Peter's_Church_-_geograph.org.uk_-_375970.jpg [장문칼럼] 잉글랜드 최초의 골잡이, 스티브 블루머
(성 베드로 성당, 크래들리, 웨스트미들랜즈)?

스티브 블루머는 1874년 1월 20일 우스터셔 크래들리(現 웨스트 미들랜즈 크래들리)에서 제철 공장 직원 컬렙 브루머와 메럽 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6명의 자녀들 중 첫째였다.?

5년 뒤 가족들은 더비셔 주의 리트처치로 이주했다. 12살 때 그는 대장간에 들어가 견습공으로 일했고, 이것은 강인한 체력을 기르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스티브 블루머의 축구 인생은 시작부터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1887년 더비셔 보이스 실드 U15에 세인트 채드 콰이어의 핵심으로서 출장하여 결승전에 오르지만, 결승전에 세인트 루카에 14-0으로 떡발리며 고비를 겪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유일하게 빛나던 선수가 그였고, 이에 그는 계속 아마추어 축구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듬해 그는 레이 제철 공장에 취업하여 일을 하면서도 더비셔 스위프트에서 스트라이커로 뛰며 일과 축구를 병행하였다.?

아니, 어떻게 일과 축구를 병행하며 살 수 있냐고? 당시 영국의 축구 체계는 보편화 되지 않았고, 심지어 풋볼 리그 자체도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풋볼 리그에 소속된 팀 조차도 선수단에게 적은 급료를 주었고, 그렇기에 축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부업이 있던 시기였다.?

사실 요즘도 아마추어 축구 리그, 혹은 논리그의 최상위인 네셔널 리그(5부리그)에서 뛰는 선수도 구단 수준에 따라 부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본론으로 돌아가 스티브 블루머의 발자취를 다시 되짚어 보자.?

1891년 버튼 스위프트와 열린 미들랜드 리그 경기에서 더비 미들랜리그의 스트라이커로 출장하여 1-1로 무승부를 거두었고, 본격적인 축구 인생의 포문을 열었다.?
7014708_orig.jpg [장문칼럼] 잉글랜드 최초의 골잡이, 스티브 블루머
(1892년, 더비 카운티의 유니폼을 입고)?

1891년 풋볼 리그 원년 팀으로 참가하여 이스트 미들랜즈의? 신흥 강호로 떠오르던 더비 카운티는 미들랜즈 리그에 참가하던 아마추어 축구계의 강호 더비 미들랜즈를 합병한다.?

스티브 블루머는 이에 프로 경기를 거부했고 아마추어 축구계에서 계속 활동하기 위하여 더비 카운티의 3군 경기에 출장했다. 하지만, 마음이 바뀐 그는 1892년 4월 더비 카운티와 프로 계약을 맺었고 전설의 시작을 알렸다!?

아마추어 축구계에서 최고였던 그도 프로 리그에서는 포지션 경쟁을 해야했고, 프로 계약 초반에는 완전히 밀려 버튼 원더러스 (現 버튼 알비온)으로 이적했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이적 과정에서 행정적으로 문제가 생겼고, 스티브 블루머는 이적에 실패한다. 우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버튼에 이어 더비 재정 보좌관 윌리엄 파커도 행정적 실수를 범하며 지미 맥러클런과 사무엘 밀스가 개막전에 뛸 수 없게 되었고, 스티브 블루머는 운 좋게도 기회를 잡게 된다.?

그는 당시 최강팀이었던 프레스턴 노스 엔드를 상대로 데뷔 골을 터트리며 이름을 날렸고, 당시 베테랑 스트라이커였던 존 구달에게 멘토링을 받아 빠른 성장을 이뤘다. 1892-93 시즌 그는 28경기 11골을 터트렸고, 이는 괴물 신인의 등장을 시사하는 뛰어난 기록이었다.?

스티브 블루머 특유의 낮고, 강하고, 빠른 슈팅 또한 베테랑 스트라이커에게 배운 것들을 응용한 결과였다.?

스티브 블루머도 "소퍼모어 증후군"을 피할 수 없었다. 레스터 포즈 (現 레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서 하프백 페기 로드와의 경합에게 쇄골 부상을 당하며 7경기 결장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부상은 괴물 신인 스티브 블루머를 막을 수 없었다. 1893-94 시즌 27경기에 출장한 그는 19득점을 기록했다.?

1894-95 시즌 29경기에서 10골을 기록했음에도 더비 카운티는 강등당할 위기에 처했다. 강등 결정전에서 노츠 카운티에 종료 직전까지 7분을 남겨두고 1-0으로 뒤지고 있던 더비. 하지만 베테랑 스트라이커 구달과 난세의 영웅 블루머는 각각 한 골씩 넣으며 더비를 강등 위기에서 구해냈다.?


410661F100000578-4567638-image-a-41_1496439706710.jpg [장문칼럼] 잉글랜드 최초의 골잡이, 스티브 블루머
(1898 FA컵 결승, 앞에서 왼쪽 두번째)?

스티브 블루머는 1895-96 시즌 더비 카운티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베이스볼 그라운드에서 첫 골을 넣었다. 그는 그 시즌 더비를 FA컵 4강으로 인도했고 팀이 준우승을 하는 것에 큰 기여를 했다.?

1896-97 시즌에 이르러 스티브 블루머는 최전성기를 맞는다. 33경기에서 31골을 넣었고 (심지어, 5번이나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당 시즌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스티브 블루머는 풋볼 리그 디비전 1에서 1896, 1897, 1899, 1901, 1904년 총 5번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는 1896년 11월부터 1897년 4월까지 20경기에서 21골을 기록하며 무서운 기세를 보였고, 1899년 셰필드 웬즈데이전에서는 한경기에 무려 6골을 기록하며 풋볼랜드 최초의 "잉글랜드 골잡이" 수식어를 달게 되었다.?

1898, 1899, 1903년 그는 더비 카운티가 FA컵 결승에 진출하는 것에 큰 공헌을 했고 출장한 375경기 동안 238골을 넣었고, 당시 많지 않았던 국가대표 팀 경기에서도 23경기에서 28골을 넣으며 더비 카운티와 잉글랜드의 골잡이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14시즌 연속으로 더비 팀내 최다 득점자였고, 당시 그리 많지 않던 해트트릭을 17번이나 기록하며 더비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심지어 그는 1890년대 더비 카운티 베이스볼 클럽의 핵심으로 활동하며 3번이나 영국 챔피언 트로피를 들기도 했다!?


s-l400.jpg [장문칼럼] 잉글랜드 최초의 골잡이, 스티브 블루머
(1907년 미들즈브러 소속 당시 스티브 블루머의 모습)?

1906년 스티브 블루머는 ?750의 이적료로 미들즈브러에 합류한다. 알프 커먼과 역사상 처음으로 ?1k의 이적료를 기록한 프레드 팬틀랜드와 함께 그는 미들즈브러 축구의 핵심이었다. 실제로, 1906-07 시즌과 1907-08 시즌 그는 미들즈브러 팀내에서 가장 많은 골을 기록했다.?

1907년 1월 5일 울위치 아스날(現 아스날 FC)을 상대로 기록한 4골은 아직도 미들즈브러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리하고 있다.?


steve-bloomer-857629990.jpg [장문칼럼] 잉글랜드 최초의 골잡이, 스티브 블루머
(1910년 렉섬과의 경기에서)?

1910년 커리어 말년을 맞은 스티브 블루머는 2부리그로 강등된 친정팀 더비 카운티로 복귀한다. 1912년 그는 팀의 우승을 도우며 다시 1부리그로 승격시켰고, 1914년 1월 31일 번리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410661C500000578-4567638-Stebe-a-61_1496440190822.jpg [장문칼럼] 잉글랜드 최초의 골잡이, 스티브 블루머
(젊은 시절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스티브 블루머)?

풋볼 리그 초창기 대표적인 골잡이로 활약했던 스티브 블루머. 국가대표팀에서 그의 위상은 어떠했을까??

1895년 3월 더비 카운티에서 활약하던 그는 활약에 힘입어 잉글랜드 국가대표 팀에 소집되었으며, 3월 3일 데뷔전에서 아일랜드를 상대로 2골을 넣으며 팀의 9-0 승리를, 잉글랜드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우승을 이끌었다.?

스티브 블루머는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자마자 신기록을 세웠다. 그는 데뷔 후 출장한 10경기에서 모두 득점했는데, 이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그는 10경기에서 19득점을 기록했고, 그 중 1896년 웨일스를 상대로한 경기에서는 5골을 넣으며 잉글랜드의 3번째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우승을 견인했다.?

1898년 4월 2일에는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2골을 기록하며 틴슬리 린들레이의 득점 기록(14골)을 넘어섰고,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통산 최다 득점자로 올라섰다.?

1901년 3월 18일에는 웨일스를 상대로 4골을 득점하며 잉글랜드에게 다시 한번 브리시티 홈 챔피언십 우승컵을 안겨주었다.?

한편 그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2번 해트트릭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2번 포커(4골)을 기록한 첫 번째 선수가 되었다.?

1901년, 그는 단 14경기만에 25골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으나, 이후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기까지 남은 6년간은 11경기에서 3골만을 기록했다. (점점 황혼기로 접어듬에 따라 폼이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시 축구계에서 권위 있던 대회로 평가받던 브리시티 홈 챔피언십 대회에서 무려 8번이나 우승컵을 들었고, 잉글랜드 국민들에게 있어서 영웅 그 자체였다.?

1911년 비번 우드워드에 의해 그 기록이 깨지기 전까지 그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통산 최다 득점자였으며, 아직까지도 12위에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웨인 루니, 앨런 시어러, 바비 찰튼의 수식어였던 "잉글랜드 골잡이"는 근본적으로는 그에게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4106F4C000000578-4567638-image-m-40_1496439696504.jpg [장문칼럼] 잉글랜드 최초의 골잡이, 스티브 블루머
(중년의 스티브 블루머)?

잉글랜드 국가대표팀뿐만 아니라 더비 카운티에서도 커리어를 마친 스티브 블루머는 1914년 7월 독일로 건너가 브리타니아 베를린 92(現 베를리너 SV 1892)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하지만 부임한지 불과 3주만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루흘벤 민간인 수용소에 프레드 스픽슬리, 샘 울스텐홈 등 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동료들과 함께 억류된다.?

수용소에는 대략 4천~5천명의 사람들이 억류되어 있었는데, 남자들이 모인 수용소에서 일어날 건 뻔하지 않은가? 억류되어 있는 와중 그들은 축구 팀을 만들어 경기를 했고, 약 1,000개에 달하는 리그 경기와 컵 대회(!)가 열렀다.?

스티브 블루머는 어째서인지 토트넘 핫스퍼 XI의 주장을 맡았고 심지어는 올덤 애슬래틱 XI를 상대로 승리하며 수용소 최대 규모의 컵 대회에서 우승을 거둔다.?

전 국가대표팀 동료들과 함께 잉글랜드 XI vs 전세계 XI 경기에 참가했고 (단, 어느 쪽에서 뛰었는지는 기록에 남지 않았다.) 크리켓 리그 경기에도 참가했다. 심지어, 루흘벤 수용소 내부에서 열린 올림픽에서는 크리켓 종목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스티브 블루머는 4년간 수용소 내부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1918년 3월 마침내 그가 억류에서 풀렸을 때, 루흘벤 수용소에서는 그를 위한 고별 경기가 열릴 정도로 그는 루흘벤의 슈퍼스타였다.?

4563368_450_450_81514_0_fill_0_c6c5434831e7e29b98d4dcc0d225d34b.jpg [장문칼럼] 잉글랜드 최초의 골잡이, 스티브 블루머
(레알 우니온에서)?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스티브 블루머는 네덜란드의 블라빗 암스테르담(2015년 해체)의 감독으로 일하다가, 1923년 레알 우니온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1924년 열린 코파 델 레이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 당시 코파 델 레이는 플레이 오프 형식으로 진행되어, 스페인 각지의 축구 팀들 중 챔피언을 가리는 대회였다. 참고로, 레알 유니온은 기푸스코아 지방의 최강자였다.?

레알 우니온은 1차전부터 안달루시아 지방의 최강자 세비야를 3-1로 꺾고, 4강에서는 카탈루냐의 최강자 바르셀로나를 꺾는다. 바르셀로나는 당시 잉글랜드 감독 잭 그린웰에 의해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고 있었지만, 2차전에 걸친 경기에서 5-1로 처참히 패배한다.?

결승전에서 레알 우니온은 스페인 중부 지방의 최강자 레알 마드리드를 1-0으로 꺾고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

세비야, FC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강호로 평가받던 그들은 블루머의 레알 우니온 앞에서 무너졌다.?

스티브 블루머는 1925년까지 레알 우니온과 함께했고, 이후에는 축구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그의 업적은 아직까지도 레알 우니온에서 높게 평가받으며, 이를 증명하듯 더비 카운티와 함께 "스티브 블루머 친선 경기"라는 이름의 친선 경기를 펼친 바도 있다.?


DxRq3yBWsAALOPf.jpg [장문칼럼] 잉글랜드 최초의 골잡이, 스티브 블루머
(스티브 블루머 동상, 더비셔 주 더비 시 프라이드 파크)?

2020년, "잉글랜드 골잡이"가 다시 더비셔 주 땅을 밟은 한편, 어제 1월 20일은 스티브 블루머 탄생 146주년이었다. 1세기 하고도 반세기가 지난 셈이다. 사람들은 왜 웨인 루니에서 스티브 블루머를 찾을까??

여기까지 글을 읽은 당신은 분명 웨인 루니에게서 스티브 블루머의 모습을, 스티브 블루머에게서 웨인 루니의 모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비단 더비 카운티 팬들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국민들은 오늘도 "잉글랜드 골잡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스티브 블루머의 모습을 찾는다. 웨인 루니의 모습을 찾는다. 보비 찰튼의 모습을 찾는다.?

그들은 "잉글랜드 골잡이"였다.?
아무리 경기력이 좋지 못해도, 그들에게서 우리는 승리를 견인할 득점을 기대할 수 있다.?

오늘도 프라이드 파크에서는 스티브 블루머를 찬양하는 노래가 울려퍼진다.?

https://youtu.be/kROUjwzjHm8

Steve Bloomer's watchin',?
스티브 블루머께서 보고 계셔?

Helping the fight,?
전투를 도우시며,?

Guiding the heroes,?
영웅들을 흑과 백의 군단으로?

In the black and the white.?
인도하시네.?

.?
.?
.?

And if you love or hate us,?
그리고 네가 우리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Just wait until we score.?
그저 우리가 득점하는 것을 기다려.?

- Steve Bloomer's Watching 中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고하기]

댓글(5)

이전글 목록 다음글

12 3 4 5
    
제목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