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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室奈美.. | 20/01/19 12:12 | 추천 37 | 조회 13473

신라 중기의 최고 명장 중 한 명 +578 [31]

에펨코리아 원문링크 https://m.fmkorea.com/best/2617438859

5454.jpg 신라 중기의 최고 명장 중 한 명

이사부. 내물왕의 4세손으로 알려져있고

지증왕이 신라를 군현제로 만들면서 실직성(현재 강원도 삼척시)을 실직군으로 만들며 군주로 임명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에 남음

실직군주가 된 후 우산국(울릉도)를 정벌하면서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되었으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산국 정벌 전후로 하슬라주 군주가 되었다고 하면서 역사적으로 다르게 서술했으나 울릉도를 정벌하면서 그때쯤 하슬라주 군주가 된 것으로 보이고


434.jpg 신라 중기의 최고 명장 중 한 명


울릉도를 정벌할때 유명한 것이 바로 나무사자.

당시 한반도에는 사자가 없었는데 불경을 통해 사자라는 존재를 알아서 울릉도 사람들이 무서워할 동물을 나무로 깍아서

겁을 주어서 점령했다고 하며, 이후 삼척쪽에서 나무사자 관련 행사를 열고 있음.


우산국(于山國)이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다루기는 어려우니 계책으로 복종시켜야 한다.”라고 하고, 바로 나무로 사자를 가득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말하였다.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지증마립간 13년(512)


울릉도때문에 유명한 이사부이지만 실제로는 고구려, 백제, 가야 모두 두들겨팬 장군인데


76766.png 신라 중기의 최고 명장 중 한 명


신라를 배울때 신라 통일의 기초를 쌓은 것이 진흥왕이라고 배우는데

그 진흥왕 이전 내물왕, 법흥왕 그리고 진흥왕 시절 가야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온 게 이사부임.



가야와의 전투내용 중 흥미로운 부분은?

《삼국사기》 열전 제 4 이사부, "이사부는 태종이라고도 하는데 성은 김씨고 내물왕 4세손이다. 지도로왕(지증왕) 시절 변경 관리가 되었는데 거도(居道)의 계략을 답습하여 마희(말馬놀이)로써 가야국을 속여 취하였다(異斯夫 或云苔宗 姓金氏 奈勿王四世孫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誤加耶國取之)."


거도라는 사람과 마희라는 내용이 뭔지 잘 모를 수 있는데 거도는 신라 초기의 인물이고, 저 마희라는 방법을 쓴 게 삼국지에 나오는데

태사자가 한 방법으로 유명함.



태사자가 북해 태수 공융의 휘하에 잠시 머물렀을 때 관해가 이끄는 황건적 잔당에게 포위된 적이 있었다. 비록 태사자는 공융의 수하는 아니었지만 공융의 도움을 받았던 어머니의 부탁으로 북해성 밖으로 원군을 청하러 가야만했다. 이에 태사자는 활과 과녁을 휘하에게 들리고 성 밖으로 나가니 성안의 군사나 성 밖의 적병 모두 크게 놀랐다. 하지만 태사자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을 끌고 성 가까이에 있는 언덕에 과녁을 세우고 활쏘기 연습을 시작했다. 연습이 끝나자 그는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고, 다음 날도 똑같은 자세로 아무 일이 없다는 듯 활쏘기 연습을 했다. 그러자 성 밖에 있는 적병 가운데 이를 신기해하며 구경하는 자도 있고,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자도 생겼다. 며칠 동안 활쏘기를 계속하자 황건적은 이제 그에게 아무런 관심조차 갖지 않게 되었다. 이를 틈타 태사자는 갑자기 말 위에 올라서 포위망을 뚫고 나갔고, 황건적들이 속은 것을 알고 손을 쓰려 했을 때는 이미 그가 멀리 가버린 뒤였다. 그리고 태사자는 당시 평원현이었던 유비에게 3천의 군사를 받아서 북해의 포위를 푸는데 성공했다.



거칠산국(지금의 부산광역시)과 그 옆의 우시산국(지금의 울산광역시)은 초창기 신라(사로국, 즉 경주시) 바로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국경지대에 위협이 되었는데 신라의 장군 거도가 변경의 지방관이 되어 두 나라를 병합할 계획을 짰다. 마침 이 당시 이 지역에는 매년 한 번씩 여러 말들을 들판에 모아놓고 군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노는 정기적 행사 마숙(馬叔)이라는 게 있었는데, 거도는 이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위장해 군사를 동원했고 우시산국과 거칠산국 두 나라 사람들도 마숙 행사를 자주 보아 왔으므로 신라가 평소 하던 대로라고만 생각해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다. 이 틈을 타 거도는 이 기병을 이용해 두 나라를 기습 공격해 멸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이사부도 가야연맹국중 소국 하나를 정벌했을 거라고 생각되며, 이런 식으로 가야를 하나하나씩 점령해나가기 시작하였고,


가야연맹의 초반을 이끌던 금관가야를 상대로 529년 신라장군 이사부는 다다라(多多羅)를 기지로 삼아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갸야연맹들 중에 하나인 안라국과 무역관계에 있던 오미노 케누(近江毛野)의 왜군을 웅천(熊川)에서 공격한데 이어서?

531년에는 구례모라(久禮牟羅)의 백제군을 패퇴시켰고 안라국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던 남가야는 세력이 약해졌다.?

그 와중에 532년 금관가야국의 구형왕은 신라에 투항하였다.(김유신이 금관가야관련 가야왕족으로 이후 금관가야의 김씨는 진골에 편입)


777.jpg 신라 중기의 최고 명장 중 한 명

그리고 고구려, 백제, 가야에 관련해서는 단양신라적성비에 이름이 남아있는데


550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국경의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놓고 서로 싸워서 지친 틈을 타서 출진하여 두 성을 모두 빼앗고, 성을 증축해 갑사 1천여 명을 배치하였으며 이때 고구려의 탈환 기도를 물리쳤다. 또한 단양 신라 적성비에 따르면 이사부는 이 때를 전후하여 파진찬 두미(豆彌), 아찬 비차부(比次夫) · 김무력(金武力)과 함께 한강 상류 일대를 신라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러면서 신라가 통일하는데 자리를 잡게 어느정도 자리를 잡게했지만 이후 모습이 잘 안 나타나다가?



4343.png 신라 중기의 최고 명장 중 한 명


백제와 가야,왜 그리고 신라가 한바탕 붙으면서 백제의 성왕이 죽데 되는 관산성 전투에도 불참하는 모습을 보이나

진흥왕이 어느정도 자리를 다시 잡고 나서 이후 가야를 완전히 정리할때 마지막 대가야를 없앨때 다시 나타나는게 되는데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전단문(?檀門)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임금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임금이 강하게 권하자 포로를 받았으나,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찬미하였다.


진흥왕(眞興王)이 이찬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라(加羅)[가야(加耶)라고도 한다.]국을 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사다함은 15, 6 세의 나이로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요청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貴幢) 비장(裨將)으로 임명하였는데, 그의 낭도로서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국경에 이르자 원수(元帥)에게 청하여 그 휘하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전단량(?檀梁)[전단량은 성문 이름이다. 가라의 말로 문을 양(梁)이라 한다.]으로 들어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병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놀라 막지 못하므로, 대군이 이 틈을 타서 마침내 가야국을 멸망시켰다.


고령군(高靈郡)은 원래 대가야국(大加耶國)으로써 그 나라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王)[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 간 유지되었는데, 진흥대왕이 이를 침공하여 없애고 그 지역을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만들었으며...




이런 식으로 기록이 되는 장수이지만 이름도 사기와 유사가 다르며, 생몰년도도 미상인 장수로 기록되있음.

그 이유 중 하나가 진흥왕이 즉위를 하면서 멀지만 왕족이고, 군권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이사부를 견제했을 가능성이 높고,

통일전쟁의 주축이 되는 금관가야계인 김유신의 큰할아버지인 김세종과 할아버지인 김무력을 군부에서 주로 쓰면서

금관가야를 멸망시킨 이사부와의 껄끄러운 관계를 이용한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음.


독도는 우리땅이란 노래때문에 알려진 이사부이지만 신라중기에 활약한 김유신 다음가는 장수 중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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